“어디서 영감 얻냐고요? 김일성-정일 부자죠”

탈북 화가 선무씨가 1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품 ‘통일 티켓’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탈북 화가 선무씨가 1일 오후 서울 구로구 고척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품 ‘통일 티켓’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뉴욕 개인전 연 탈북화가 ‘선무’
‘평화와 화해’ 프로젝트…‘조선의 예수’ 등 12점 전시
“닫힌 북한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림 그렸다”

지난 1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평양에서 서울 가는 열차 티켓을 손에 쥔 한 북한 소녀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중인 ‘통일 티켓’이라는 20호짜리 그림이다. ‘선’(휴전선)이 없다는 뜻의 그의 이름 선무(線無)처럼 현재 그의 염원을 표현한 작품이다.

얼굴 없는 작가, 이름 없는 작가로 알려진 탈북 화가 선무(40). 그가 지난달 16일부터 미국 뉴욕 맨해튼의 에스비디(SBD) 갤러리에서 개인전 ‘마인드 더 갭’을 열고 있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큐레이터 김유연씨가 ‘평화와 화해’를 주제로 올해부터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주요 전시로 작가를 초대했다. 김정일·김정은 부자에게 바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담은 50호짜리 작품 ‘조선의 예수’를 비롯해 탈북자 이야기를 소재로 한 ‘탈출’ 시리즈 2점, 북한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그린 ‘환희’ 등 작품 12점을 선보였다.

“뉴욕 전시회 첫날 한 여성 프리랜서 저널리스트가 제 작품을 구입하면서 ‘어디서 영감을 얻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나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김일성·김정일 부자’라고 답했습니다. 그들 때문에 이 작업을 하니까요. 아마 제가 그 사회에서 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작업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북한 사회에서 살아왔고 이제는 그 바깥에서 살아가지만 여전히 관심은 내 부모와 형제가 살고 있는 북한이기 때문에 당연히 김일성·김정일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첫날 우연히 뉴욕을 방문한 이준익 영화감독이 찾아와서 ‘멋있다’고 하더라”고 귀띔했다.

뉴욕 전시회에서는 주로 김정일·김정은 부자의 그림에 관심이 쏠린다고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에 예수의 머리를 씌운 ‘조선의 예수’, 또 자물쇠가 열쇠에 의해 열린 모습을 형상화한 금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그림 ‘김정일’ 등에 관람객의 발길이 오래 머문다고 한다.

“닫힌 북한, 그 속에서 사치하는 김정일의 모습, 그리고 북한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유엔에서 일하는 분이 ‘그 그림들을 유엔에서 전시할 수 없느냐’고 하기에 ‘김정일과 상의하라’고 했어요.”

그림 ‘김정은’은 청색 인민복을 입은 후계자 김정은의 왼쪽 가슴에 김일성의 초상화 그림 대신 나이키 로고를 그려 넣었다. 그는 “김정은만은 외부 세계와 닫힌 세상 말고 열린 세상을 살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에 유독 북한 어린이들이 많이 등장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어린 시절 행복했다고 기억한 순간들이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행복이나 자부심과는 너무 차이가 나더라고 했다. 그 행복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그는 “북한이 개방되어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좀 더 나아졌으면, 그 속에 사는 나의 부모, 형제, 친구들이 좀더 낳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 내 그림의 주제”라고 밝혔다.

북한의 한 사범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2001년 30살에 두만강을 건너서 북한을 탈출했다. 중국에서 2년 정도 숨어 살면서 “남북이 갈라진 비극과 국적 없이 숨어 사는 비애를 뼈저리게 느껴” 타이를 거쳐서 2002년 초 남한으로 건너왔다. 그 뒤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전업작가로 나섰다. 2008년 첫 개인전 ‘우리는 행복한 세상에 삽니다’ 등 크고 작은 5~6회 전시로 미술계에 이름을 새겼다.

그의 이름 ‘선무’는 홍익대 시절 그를 가르쳤던 이용백 작가와의 합작품이다. 이 작가가 ‘분단의 장벽이 없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무선’을 제의했고 그가 뒤집어 ‘선무’로 결정했다.
그는 다음달에는 서울 강남에 자리잡은 주한 유럽연합 상공회의소에서 전시회를 연다. 북한에서 그린 작품과 북한을 떠나 서울에서 작업한 그의 작품을 나란히 전시할 예정이다. 북한의 안과 밖을 비교해서 보여주려는 것이다.
“아직도 북한에 살아 있을지 모를 부모님과 형제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럴 때마다 붓을 잡습니다. 좋은 작품으로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490443.html#csidxb68876480a0e3879ca7949537661929

 

 


불러오다 bring展

과거에서 불러온 미래 ● 2002년, 대한민국이 붉은악마의 물결로 일렁이던 해에 선무는 남한에 왔다. 마치 북쪽의 집단체조를 연상시키며 모두가 하나 되어 외치는 '대한민국'은 선무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었기에 북이나 남이나 별 다를 것 없는 사람 사는 세상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다만 감시하는 사람도 없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연습된 상황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북과 남 사이에 높게 쌓인 벽들이 선무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 대한민국에 초짜인 선무에게 한갓 볼 차기 게임을 놓고 밤새도록 광란하며 거리를 무리지어 싸돌아다니는 무정부 상태가 결코 옳을 수는 없었다.

선무가 북쪽을 벗어난 것은 세계가 세기말 몸살을 앓고 있던 1998년이었다. 남한 사회에서는 아직도 휴거(携擧)를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외환위기로 인해 새천년의 기대감이 상쇄되던 때였다. 남한에 들어오기까지 3년 반 남짓한 시간들은 선무에게는 암흑기였다. 아시아의 덜 성숙된 몇몇 국가들을 표류하며 20세기 야만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무지막지하게 팽창된 제도들에 의해 봉인된 삶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거울로 된 유리방에 갇혀 무수히 반복되어 반사된 헤아릴 수 없는 자신들에 의해 정작 나 자신의 실체가 실종되어버린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은 유치된 자아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오직 그에겐 동물처럼 생존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아직도 이로부터 홀연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그의 인생에서 유리방을 빠져나와 거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여유가 생긴 것만은 사실이다.

근 8년간의 남한생활이 30여년의 북쪽생활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개인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유하며 보냈던 시간이 짧았던 선무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전체주의의 환영과 지배와 피지배의 틈을 교묘히 노리는 욕심들의 악취를 떨쳐버리기 버겁다. 그래도 남한에서의 시간은 여러 사람들과의 상봉과 이별을 만들어주었다. 그 사이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3번의 개인전과 각종 국제전에 초대되어 뜻하지 않은 외국여행의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이제는 몰래 숨어들거나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예술가의 자격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나름 지구인이 된 셈이다.

꺄악2 Scream2, oil on canvas, 72x60cm, 2010

소리가 보이고, 색깔이 들린다. ● 알록달록하고 다소 시끄럽게도 느껴지지만 선무 작품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뭔가 배경음악 내지는 많은 사람들의 구령 또는 구호소리가 요란할 것 같다. 그리고 코카콜라 광고판도 아닌데 생색들이 화폭에서 부유한다. 한마디로 뭔가 격양된 분위기가 있다. 더구나 북쪽의 선명한 글씨체들이 뒤섞인 화폭에서는 지난 20세기 거대사상의 유령들이 전체주의에 복무할 것을 재촉한다. 21세기 들어와 그 유령들이 두려운 존재는 아니지만 아직도 엄연히 발견되는 일상에서의 벽들은 새삼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념의 금자탑을 반성하게 만든다. 어찌되었건 선무 작품에 등장하는 인민들은 조국이라는 유토피아에 귀의하여 갓 세상에 눈을 뜬 순진하고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에 태양이 하나인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따스함을 즐기고 있다. 해바라기 입장에선 어둠 속에 반짝이는 달과 별들을 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 한편 '식민지 조국의 품안에 태어나 세상에 부럼 없이 사는 방법'을 찾으려 했던 유토피아의 지도자는 선무의 화폭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진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당찬 꿈이 아직도 선무에게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앤디 워홀의 마오나 중국 당대 예술인들이 그려낸 마오의 초상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최근에는 그 지도자의 얼굴에 종교적 숭배의 이미지가 합성되었다. 이념적 우상화와 종교적 아이콘 그리고 다국적 자본주의의 심볼들에 섞여버린 지도자의 초상. 굳이 그것을 특정인물의 초상화라 칭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빠져들어 갔던 거울처럼 엄청난 흡입력을 지닌 세상에 반추된 생경한 풍경화로 보여지기도 한다.

나의 작품들은 현재의 북한의 모습과 남과 북의 미래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조선의 예수」작품에서는 지금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으로 믿고 있고 그 품을 떠나서 살 수 없다고,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고 하는 그런 교육을 하는 북한을 이야기 해보았다. (선무)

문제는 미래다. ● 과거 변혁에 복무했던 사회주의 창작방법론의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북쪽 영도예술론의 핵심도 사람이다. 물론 북쪽에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더 중요하겠지만 반쪽 국가를 넘어온 예술가 선무의 입장에서는 쉽게 지울 수 있는 기억들이 아니다. 더구나 머리가 아니라 몸에 스며든 창작태도는 불혹을 넘어선 나이에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북쪽에서 미술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선무는 인민예술가도 창작소의 일원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각문화라는 것은 보이는 것이라 창작이 결과 되기까지 상당부분을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더구나 내용담지체적 형식인 조형작품에 있어서 형식은 당대의 지적 기술적 여건과 시각적 충격의 경험치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나마 남한 시각문화의 축적도가 이제는 결코 얇지 않기에 선무라는 작가의 자유로운 활동이 허용된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노파심이지만 선무의 작업을 단순하게 '반공포스터'로 읽으려 하거나 '삐라'처럼 불온하게 위치시키려는 아둔한 생각들은 없길 바란다.

선무 작품이 지칭하는 장소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다. 우리가 선무 작품을 보면서 자꾸 과거 냉전의 시대로 회귀하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북쪽 예술 및 문화에 대한 정보가 너무 미천한 탓이다. 그리고 지난 세기 이성과 체제에 대한 과신이 만들어낸 야만적 지배구조의 잔해들 때문일 것이다. 하늘에 밝은 태양이 지고 나면 아련한 달과 무수히 많은 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또다시 태양은 뜨겠지만 어제의 태양은 오늘의 태양이 아니다. 물론 그것을 바라보는 나 또한 어제의 내가 아니듯이... ■ 최금수


선무展 / SUNMU / 線無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실존적 발언 ● 선무(線無). 그 이름이 함의하는 바, '선 없음'은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선언이다. 선무의 예술은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실존적 발언이다. 그는 체제로부터 이탈한 개인이다. 그는 체제가 전혀 다른 북한에서 남한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겼다. 따라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삶의 가치와 방식이 전혀 다른 두 체제에 관한 차이에 근거하고 있다. 삶의 터전을 옮긴 예술가 선무에게 있어서 탈주의 정신은 예술가로서의 삶에 깊이 투영된 실존이다. 비록 그것이 지배와 복종으로 얽혀 있는 인류 문명사 자체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로부터 또 다른 체제로의 이동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에서 나고 자라서 남한으로 이주한 탈주의 실존은 선무의 예술세계 근간을 형성하는 주요 모티프이다. 선무의 예술적 발언은 서로 다른 경제구조나 정치구조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접한 세상의 면면, 특히 그가 태어나서 자라난 북한 땅의 현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차이를 넘어서기까지 남한에서 체험한 7년의 세월은 한 개인의 삶 전체를 뒤바꾼 긴 세월이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내면 체험을 키우고 공론영역에서의 발언으로 공표하기에는 선무의 남한 체험은 아직 짧고 얇은 수준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것을 듣고 보았을 것이고, 이곳 남한 사회마저도 자본과 정치권력의 작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회라는 것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남한을 이야기하지 않고 북한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서사 대부분은 북한 사회에 관한 것이다. 바로 이 점, 선무가 남한 사회에서 북한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점을 들어 그의 서사를 국외론자의 낯선 이야기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이야기로 들을 것인지는 선무를 독해하는 우리의 사유와 감성에 달려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라보는 권력의 작동 방식이나 사람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 체제 사이의 유사성과 차별성이 공존한다는 데에 있다.

엄마 여기 서울이야 Mom. This is Seoul, oil on canvas, 91x72cm, 2010

선무는 이 시대의 예술가들 가운데 매우 드물게 분단 이데올로기가 고착화한 한반도의 양면을 동시에 성찰할 수 있는 독특한 체험의 소유자가 이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선무의 그림은 '세상에 부러움 없이 행복한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가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는 지금 여기 남한의 상황과 분리가능한 것이 아니다. 남과 북은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휴전에 합의한 상황에 놓여 있다. 말 그대로 위기의 일상화이다. 전쟁 발발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분단과 대결의 구도를 종식시키지 못한 채 평화와 위기,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고 있다. 선무는 이 분단과 대결의 상황에서 스스로 한 쪽으로부터 다른 한 쪽으로 이탈한 존재로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선택한 새터민이다. 따라서 그의 내면에는 생존의 가치와 방향에 관한 복잡다단한 서사들, 즉 절망과 희망, 상처와 환희 등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고착화한 대결구도 속에서 탈주의 실존을 담은 선무를 통해서 북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치나 미디어가 양산하는 정보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도 그의 그림이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선무의 작품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는 집단주의에 대한 거부이다. 그는 해맑게 인간의 본성을 숨기지 않을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환하게 웃으며 세상에 부럼 없이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을 선전하는 장면을 여러 장면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행복을 선포하는 어린 아이의 배경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선무의 그림은 이처럼 단순명료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북한은 민중의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위기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는 여전히 체제의 우월성이나 가능성을 선전하고 선동한다. 선무의 그림이 낯설면서도 친숙한 것은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양식을 패러디해서 그 양식이 애초에 의도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묻는다. 과연 그들은 행복한가? 나아가 그는 묻는다.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행복의 여부는 타자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바에 의거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선무가 말하는 것은 그들의 행복과 불행을 예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복을 기획하고 있는 집단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아이팟을 들고 해맑게 웃고 있는 북한의 소녀를 보면서 여전히 '우리는 행복하다'고 강변하는 선무의 상황설정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선무의 그림에서 보이는 비판적 서사들이 체제의 차이를 넘어서는 구조의 동질성을 어렴풋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그가 남한에 정착한 첫해에 열린 2002 월드컵 게임 열풍을 접한 선무는 남한 사회에도 집단주의 광기가 팽배하다는 점을 보고 느꼈다고 한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단일한 사안에 몰입하는 대중의 모습은 북한에서 익히 보았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집단의 광기 속에서 안도하며 희열을 느끼는 개인의 모습은 아마도 인류 공통의 것일 텐데, 문제는 그것을 조작하고 활용하는 권력의 속성에 있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바로 이것, 권력과 대중,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 관한 선무의 통찰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는가 What adults give to children, oil on canvas, 91x71cm, 2009

선무의 그림이 가지는 또 한 가지의 독특함은 스타일에 있다. 선무의 그림 스타일에는 두 가지 대비되는 특징이 있다. 그의 그림에는 대담하게 그은 선의 맛, 즉 일획의 감성을 잘 살린 것이 있는가 하면, 붓질 자국을 남기지 않은 색면 처리로 형상의 윤곽을 명쾌하게 구분짓는 것이 있다. 전자의 그림은 아무래도 북한에서 말하는 조선화의 영향이 확연히 보인다. 후자는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유니크한 화면 구성과 닮아 있다. 조선화의 영향은 붓질뿐만 아니라 색채의 구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밝고 맑은 색채를 구사한다는 조선화의 원칙은 선무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완연히 나타나는 특징이다. 참새나 갈대, 갈매기 등의 표현은 몰골 필체의 획선으로 대상의 동세를 잡아내는 날렵한 붓질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그것은 키치 회화의 범본이 되는 매우 친숙한 스타일이다. 동일한 형상을 반복해서 배치한다거나, 단일한 것 또는 대비되는 두 색의 병치 등으로 심플한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포스터 양식의 친숙함도 선무 그림의 대표적인 양상이다.

간결한 형상표현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비판적 메시지를 담는 선무 그림은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를 패러디한 블랙 유머이다. 그것은 북한이 선전하고 선동하는 체제의 우월성이나 조작된 행복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다. 그렇다면 남한 사회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북한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대면하면서 그 사유와 감성에 동의하는 맥락은 무엇일까? 북한의 비극을 바라보는 지금 여기 우리의 시선이 단지 한반도 북쪽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비판과 연민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무의 예술을 보다 넓은 해석의 지평으로 펼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역지사지에 있다. 우리 안의 파쇼 우리 안의 가부장, 우리 안의 우상의 모습을 선무 그림에서 발견하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자본의 이름으로, 권력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일상 속 폭력과 야만의 그림자가 우리 삶의 주변에서 어른거리고 있다는 점. 경계없는 삶을 지향하는 실존의 예술가 선무의 그림이 남 얘기가 아닌 내 얘기로 깊이 다가오는 이유이다. ■ 김준기


What's Behind Kim Jong Il's Ray Ban Sunglasses?

Sunmu always knew that his talent lay in art. Unlike many other North Korean boys forced into military posts or farming, he was grateful to have achieved what he had always wanted: becoming North Korea's state propaganda artist.

The biggest honor for a North Korean artist is to receive the state's imprimatur, giving him license to handle portraits of the communist nation's late founder, Kim Il Sung, and its current leader, Kim Jong Il.

"I used to peek inside the curtained window when high-level artists came to our hometown, all the way from Pyongyang just to fix cracks on those portraits hanging on top of the community center," said Sunmu, who has lived under an assumed name since his defection to South Korea.

He still has family in the North. He says their lives are at risk if his identity is revealed. He says not only painting but even touching the portraits of the two Kims is considered sacred in communist North Korea.

But today, Sunmu is painting the two men as much as he wants -- and with a touch of satire, which, he confesses, helps "to heal the huge hole in my heart."

In his latest exhibition in Seoul, an oil painting of Kim Jong Il wearing his trademark Ray Ban sunglasses welcomes guests to the gallery.

At first glance, it looks just like any other portraits that can easily be spotted in North Korea. The background is painted bright red, a symbolic color of the revolutionary comrades.

But a closer look at what's reflected in Kim's lenses reveals Sunmu's message; hunger-stricken people fleeing bare soil while soldiers point guns at their backs.

"Kim Jong Il knows how miserable the people live. But he blinds himself behind those black sunglasses he loves to wear in public," Sunmu said.

Hunger drove Sunmu to cross the river bordering North Korea and China. His venture into the northern Chinese provinces to find food and money for his parents and siblings back home failed.

After three years of hiding in China and in the jungles of Southeast Asia, he eventually found a new home in South Korea in 2001 with help from missionaries. Since then, he has continued his career as an artist, graduating from a prestigious art school in Seoul. He is now married to a woman he met during the journey to freedom and has a 3-year-old daughter.

'North Korean Kids Deserve to Know...Another World'

"Whenever I see my little girl growing up so healthy in this fortunate environment, it reminds me of those poor innocent children back in the North. They're brainwashed to think they are happy children," he said, singing a verse from a famous North Korean children's song called "We Envy Nothing in the World."

The lyrics describe how happy they are, how lovely their country is, and their home is in the arms of the Communist Party under their father Kim Il Sung. "You see here, they are singing that we-are-happy song in perfect unison," Sunmu said, pointing at a painting that shows a row of red-dressed North Korean girls singing and bowing at a performance.

"But this girl at the end is curious about those girls in the South," he said, pointing to another painting hung next to it. It shows a hip performing group in South Korea wearing colorful tank tops, low-waist hip shorts, and knee-length boots.

"This is what I hope to see in the future. North Korean kids deserve to know that there is another world where you can sing and listen to all kinds of music, not just the propaganda song," said Sunmu in a hollow voice. Many of his paintings are of North Korean children who appear to be curious, or holding items like Coca-Cola, iPods or cigarettes.

His dream now is to see the day when the two Koreas unite so that he can then search for his family, whose thoughts haunt him, left back in the North. That is why he goes by the pseudonym Sunmu. It literally translates into "no divisions" or "no borders."


KOREA NOW展

선무는 탈북 화가이다 ● 선무는 2006년 이후 한국 미술계에 등장한 주목 받는 작가 중 독특한 위치에 있는 화가이다. 새터민 가운데 유일한 직업화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반도 문제를 공유하는 유럽과 영미권의 많은 이들에게도 단연 화제의 중심에 있다. 여러 매체에서 그를 인터뷰했고 중요한 기획전들에 초대되기도 했다. ●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또 그의 그림에 섬세한 눈길을 돌리기에는 탈북 화가라는 그의 실존적 얼개가 너무도 강렬하다. 그와 그의 작품을 대할 때 우리는 사회과학적이며 정치경제학적인 태도를 버릴 수 없다. 굳이 북한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통일부에 적을 두고 있지 않더라도 그렇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이후 축적된 애증의 모순투성이가 의식의 깊은 내부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다. 애초에 어설픈 감성적 수식어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선무의 예술적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실존적 얼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무와 우리는 불가피하게도 거기에서 출발해 조우해야 한다. ● 선무는 대학 3학년까지 북한에서 미대를 다니다 오랜 기간 생사의 경계에서 이리저리 쫓기며 광대한 중국과 동남아의 밀림을 가로질러 남한에 정착했다. 남한에서도 미술을 전공했고 현재 북에서 못 이룬 화가로서의 일상을 살고 있다. 남한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선무의 생활은 크게 바뀌었다. 미술시장에서 그의 그림은 인기 있는 품목이 되었고 어떻게든 선무는 그에 적응해야 했다. 이렇듯 선무의 남다른 과거로 인해 세계미술에 편입되는 한국의 평균적인 현대미술과 달리 그와 그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길을 간다. ● 눈에 보이는 것과 실체는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긴 여정 끝에 북한을 살다 남한을 사는 화가 선무의 삶과 그림은 우리의 인식과 상상의 밖에 있다. 그와 우리 사이에는 냉전과 현대사의 그 숱한 질곡의 이미지와 수사(修辭)만이 빽빽하다. 난감함의 향연이 끝없이 이어진다. 남과 북의 삶을 모두 구체적으로 사는 것은 오롯이 선무에게만 해당된다. ● 오늘날 예술가들은 그 자신의 소외를 경험하지 않고는 어떤 창작도 불가능해 보인다. 창작은 경험에서 솟아오른다. 작품의 감상과 이해 또한 경험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감과 일체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이상적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기에 선무의 경험과 우리는 너무도 멀다. 이 요원한 거리와 틈이 서로를 소외시키며 상호 결핍의 상태를 만든다. 우리가 먼 만큼 선무 또한 우리와 멀다. 낯섦이고 타자중의 타자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선무의 그림 앞에서 무력하다. 우리는 도저히 북의 실체를 그릴 수 없다. 우리에게는 관념적이거나 이미지로서의 북한만을 그릴 수 있을 뿐이다. 세계 유일의 권력세습제 공산국가, 인권 사각지대, 그리고 굶주림과 억압으로 죽어나가는 인민의 모습. 거기엔 어떤 미술사의 방법론도 예술적 이론과 비평도 궁지에 몰린다. 그의 그림이 바로 우리 코앞에서 벌이는 이 깜깜한 막막함의 실체는 그러기에 불안하고 생득적이다. ● 그림 속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 사이비교주로 분한 김정일, 부러울 것이 전혀 없는 삶을 산다는 북의 사람들의 얼굴에서 화가 선무의 얼굴을 본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서로 매우 닮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동족(同族)이라는 피의 순결과 집착, 이 삶의 부조리성이 선무와 우리가 관계를 맺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 밖의 길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나 어때! How do I look!, oil on canvas, 72x60cm, 2009

북한뉴스와 일기예보 ● 만일 예술이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그 환영을 깨는 것은 삶과 현실이다. 남과 북이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각자의 길을 따라 만들어 온 균형과 환상은 선무의 삶과 그림 속에서 해체된다. 그의 가장 개인적인 예술적 사건은 개인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등장으로 한국전쟁의 정전(停戰) 이후 사이비 평화에 익숙한 의식은 치명적인 진실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것은 현실의 구체적인 경험으로 예술을 완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예술은 경험을 원천으로 하니 말이다. ● 선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단순히 호기심의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 여가선용으로서의 그림감상에서 탈피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선무 개인의 의지도 그의 그림의 주제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그것이 우리와 선무에게 주어진 유일한 조건이다. 그것은 동시에 예술의 조건이다. 선무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투명한 사실을 확인한다. 예술의 안에서 벌어지는 것보다 예술의 밖에서 벌어지는 것들이 더욱 드라마틱하다는 것을. 역사는 분명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필연과 우연이 적당히 섞인 채 작은 사건들이 전체 변화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가 유난히 그렇다. ● 남한은 북한이 한창 잘나가던 60, 70년대 그리고 80년대를 전쟁과 빈곤 그리고 군사독재라는 이중 삼중의 현실과 싸워야 했다. 베트남의 밀림으로 독일의 광산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래사막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은 가야 했다. 병태는 자청해 바보가 되었고 고래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 당시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아서. 우리는 난쟁이가 되었고 어둠의 자식들이라 외치거나 서울 예수를 쫓았다. 지난 시기 우리의 모습은 오늘 북한을 탈출하는 이들과 오버랩 된다. 이 씁쓸한 닮음이 마치 덧난 상처와 같이 쓰리다. ● 우리는 오랜 시간의 질곡을 지나 21세기를 살고 있다. 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가 햇빛정책을 시작하면서 미술관계자들 사이에서 한반도의 통일 이후의 미술문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이미 여러 세대 동안 전혀 다른 사회를 경험한 이들의 미술이 어떻게 정상적으로 소통가능한지, 또 어떻게 만나야 소통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그러나 여전히 철통 같은 DMZ의 현존에 반비례해 우리의 인식은 불분명했다. ● 매일 전송되는 북한뉴스를 생각해보자. 북한뉴스는 마치 9시 뉴스 말미에 붙는 일기예보처럼 반복된다. 일기예보와 다른 점은 매번 같은 기상변화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맑음과 흐림을 반복. 이 반복이 재생산해내는 또는 해가 바뀌어도 자기 복제를 반복하며 왕왕 한랭전선이나 장마전선을 이루기도 하며 불안과 우울을 예고한다. 그러면 일기예보관은 북이나 남으로의 외출을 가능한 삼가 하길 권한다. 바뀌는 것은 일기예보관의 미모와 패션뿐이다. 기상예보가 틀려도 별로 상관없다. 북한의 핵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유령이 되고 김정일은 이미 여러 번 죽었다. 그렇게 남과 북은 서로에게 보여주고 싶은 스타일과 이미지만으로 존재한다.

korea의모습(남) the image of Korea(South), oil on canvas, 162x130cm, 2009

 

korea의모습(북) the image of Korea(North), oil on canvas, 162x130cm, 2009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것 ● 누군가 질문한다. 한국은 반도국인가? 대부분 정상적 교육을 받은 이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경도와 위도가 가로지르는 세계지도 속의 한국은 그렇다. 그러나 선무에게는 그렇지 않기도 하다. 누군가는 한국은 섬나라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한국에서는 비행기나 배를 이용하지 않는 한 다른 나라로 넘어갈 수 없지 않은가. 분단국가의 지리학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리시간의 과학적 상식은 문화적 또는 정치경제학적 오류로 판명 난다. ● 선무는 중국 대륙과 라오스의 밀림을 돌아 남으로 왔다. 개성공단의 공산품이나 소나 쌀은 오고 갈 수 있어도 선무와 우리에게 남과 북은 목숨을 걸어야 오갈 수 있는 섬과 같다. 북한은 관광 상품으로 소비할 수는 있어도 자유로이 공감하거나 소통할 수는 없다. 슬프게도 가슴 진한 가족상봉과 고향방문의 살풀이만이 오고 간다. 더욱이 그 살풀이조차 제한적이며 미디어로 매개되는 울부짖는 이들의 모습은 낯설고 비현실적이다. 살을 에는 현실은 그저 실성한 노인들의 신파로 전락한다.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기 보다는 일상에서 겪는 사사로운 고통을 위한 것이다. 불경스럽지만 남북의 현실은 과잉현실의 희비극으로 변모한다. 처참한 현실은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시네마의 재료일 뿐이다. 우리는 제 3자의 자리로 밀려나고 관객이 되어 의도하지 않은 비극적 소비자(消費者)가 된다. 이런 역설이 우리의 논리이고 합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더 이상 같은 민족이라 부르길 주저하게 하는 끝없이 밑으로 주저앉는 불안의 실체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명한 진실과 이념이 사라진 텅 빈 망각의 현실이 우리를 구성한다. 우리는 단지 한편의 에피소드를 증언하는 화자(話者)일 뿐이다. 우리가 발을 딛는 실존의 이방인이 된다. ● 통일이 되면 우리 모두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민족과 국가의 행복과 나 개인의 행복은 일치할 수 있을까? 혹 섬나라로 추락한 우리의 어떤 막연한 맹목은 아닐까? 알 수 없다. 통일이 우리의 소원이고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선지자들의 계시는 불투명하다. 우리 사회의 작은 모순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것이 민족이 안고 있는 큰 모순과 갈등 때문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잃고 어떤 황당무계한 금기처럼 불편하다. 한민족과 가족에 기초한 우리사회의 순결한 금기의 드라마는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 둘이란 숫자는 불안하다고 말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때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해방 이후 남과 북으로 또 좌와 우로 갈라진 세계는 고통스럽지만 시간을 따라 흘러갔다. 시간은 우리가 비통한 현실을 망각하고 웃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남과 북, 좌와 우의 분열된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무거운 대가를 끝없이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놀랄 일은 아니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사는 한국의 모습은 그렇다. 이 지루한 불안과 비애는 구체적이며 투명하다. 이런 현실이 우리가 보려 하는 탈북 화가의 겉모습을 구성한다. 북에서의 성장과정과 탈북 과정, 남한에서의 적응과 창작과정을 형성하는 것들의 이해는 예술의 과제이기에 앞서 실존의 과제이다. 역사는 하나가 둘이 됨으로써 생기는 불가피한 상처를 가르쳤다. ● 어느 민족에게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겉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은 단지 지금 나의 문제가 아니거나 의식적으로 문제의 선상에 올리지 않아서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 절박한 문제는 일상적인 문제로 번역되고, 선무와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웃을 수 있다. ● 선무와 우리는 가장 합리적이며 올바른 만남에 대해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다. 어떤 훌륭한 조언도 원하는 답을 주지 못한다. 어떤 제안이나 충고도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구석이 있거나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기간에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결핍과 긴장이다. 이 팽팽한 실존의 비루한 긴장상태가 그와 그의 그림,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반복하여 끌어당기고 밀어내게 한다. 이것이 우리와 선무가 감당할 몫이다. 그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우리에 대한 그의 오해는 동일하게 타당하고 존중 받아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선무와 우리의 학습은 현재진행형에 있다. 이 전시는 단지 그 길에 들어서는 길목 어딘가를 가리킬 뿐이다. 서로가 인정할 정도로 제대로 만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 김노암


세상에 부럼없어라展

핑크 빛 속삭임의 노래 『세상에 부럼없어라』 ● 2008년 새해 설날을 맞아 북한에서는 갖가지 크고 작은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는 당의 주요 인사들과 외교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학생소년들의 설맞이 모임인 『세상에 부럼없어라』 공연이 펼쳐졌다.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말은 북한 주체사상의 선전표어로 모든 분야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하늘은 푸르고 내 마음 즐겁다 손풍금 소리 울려라 / 사람들 화목하게 사는 내 조국 한없이 좋네 / 우리의 아버진 김일성 원수님 우리의 집은 당의 품 / 우리는 모두다 친형제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노래가사는 북한의 사회주의체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말은 '세상에 좋은 일만 항상 있으라'라는 뜻이다. 즉, 김일성 수령님 밑 사회주의 세상에서는 언제나 행복한 일만 있다는 말인데, 이 노래를 들으면 왠지 모를 씁쓸한 서글픔이 밀려온다. 밥 한그릇 먹지 못해서 죽어가는 이가 수두룩하고 한 해에도 수천 명의 이탈국민이 생겨나는 상황에서, 또 국가는 여러 가지 차관을 위해 폐기된 핵시설을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펼칠 수 밖에 없는 현실 위에서 이 노래는 과연 누구를 위해 불려지고 있는가? 개혁, 개방을 하고 싶어도 쉽게 할 수 없는 21세기 사상누각의 대명사가 된 북한이 스스로의 체제를 존속시켜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불러재끼는 노래가 바로 '세상에 부럼없어라'이다. 이를 악물고 정해진 웃음을 지으며, 연습한 동작을 펼치는 어린아이들의 얼굴 그 어디에도 부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얼굴은 마치 "우리는 왜 이렇게 불행할까요?"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어설픈 키치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렇다면 북한 어린이를 바라보는 우리들은 과연 행복한 것일까? 그네들의 반대편에서 가엾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들의 부럼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진정 행복한가? 선무의 이번 전시 『세상에 부럼없어라』는 이러한 물음들에서부터 시작한다.

생일날 아침 Birthday morning, oil on canvas, 130 x 162cm, 2008

 

생일날 Birthday, oil on canvas, 91 x 116cm, 2008

선무, 남한예술을 시작하다 ● 2002년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넘어 온 선무라는 개인이 예술가가 되어 예술행위를 펼쳤을 때 남한 사람들의 시선은 관심 그 자체였다. 많은 언론에서 그를 인터뷰하고, 그와 그의 작품을 소개했으며, 미술계 여기저기에서 찾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왜일까? 그의 작품이 예술적으로 대단해서였을까? 아니다. 선무가 탈북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결코 경험해 볼 수 없는 탈북이라는 달콤한 소스에, 언제나 먹고 싶은 예술이라는 난해함이 만나 적정의 하모니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의 중심에 바로 선무가 있다. 이제는 탈북해서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들에 대한 국가적 환영의 시대는 지났다. 왜냐하면 한 해에도 수 천명의 탈북자가 남한으로 들어오고 있는 사회적 부담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의 흡수통일에 대한 선례에서 오는 우려와 한국인으로 살아가기에 너무나 버거운 현실에서도 탈북은 여전히 관심거리다. 그 관심의 표면을 벗겨내면 무엇이 있을까? 거기엔 약간의 우월감과 거리감, 그리고 비교대상으로써 '그는 어떠한 생각을 할까'라는 호기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인가? 선무가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가? 물론 선무가 겪은 특수한 상황을 바라보는 동정의 관심이 그와 그의 작품을 잘못 이해하는 덫이 될 수도 있다. 아시아의 블루칩 중국미술의 싹쓸이가 자본주의의 배는 채워줬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삶을 생각하고, 이용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써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그리고 그들의 작품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여기 북한출신 작가 선무가 있다. 어떤 이는 그를 희소성의 경제적 가치로 볼 것이고, 또 다른 이는 그를 소외자, 혹은 이방인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아야 할 선무는 스스로의 삶을 영위해나가면서 자신의 기억과 자신이 겪은 경험들의 파편들을 끄집어내어 정리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의 선무이다. 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도 아니며, 언론 미디어의 좋은 기사거리 또한 아니다. 그는 이 땅을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 중 예술활동을 하는 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이 정리되었다면 이제 그의 이야기를, 그가 작품에서 풀어내는, 작품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볼 준비가 되었다. 그럼 화가 선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이들의 지저귐 『세상에 부럼없어라』 ● 앞서 선무의 이번 전시가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물음들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의 작품 「세상에 부럼없어라」는 아이들이 손잡고 즐겁게 노래 부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북한의 축하공연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하얗고 정갈한 레이스 셔츠에 남색치마를 두른 소녀들이 팔 벌려 손잡고, 입을 크게 벌리고 명랑한 노래를 부르는 생동감은 그것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생동감 있는 진실성을 표현하고자 소녀들을 등신대로 그렸다. 아마 처음에는 더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성인의 크기에 맞게 그렸을 것이다. 아이들의 머리 위, 파란색 배경으로 뒤덮힌 곳에는 얼굴의 흔적들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작가는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노래를 어릴 적부터 부르면서 컸고, 많은 축하공연을 보았다고 한다. 어릴 때 바라보던 누나들의 맑고 우렁찬 노래는 소년 선무의 귀와 눈에 환상적인 소리와 이미지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한 환상은 언제나 기억 속에 더 큰 이미지로 각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북한 주체사상의 선전으로 끊임없이 불려 질 때 인간의 감각은 무디어 진다. 자신이 알고 있던 관점과의 비교 군이 없기 때문에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진실이 된다. 나아가 이러한 기억들은 기념비적인 크기로서 자신의 실제 기억을 억누른다. '그래 그 때 보았던 것이 정말 크고 웅장했지! 아마 집채만 했을 걸!'식의 기억들은 자신의 기억을 왜곡시키고 자신의 행동을 영웅화시키기에 이른다. 물론 그 믿음이 처음에는 주저하는 시기가 있다가, 나중에는 진정으로 그것을 사실로 믿게 된다. 이것이 바로 증폭되는 거짓말의 원리이다.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사회주의 선전표어와 김일성 우상화는 북한에서 태어나 자라는 어린이들에게는 진실 그 이상의 진실, 즉 사실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파간다의 논리이다. 선무는 바로 이러한 선전의 상황들을 '아이들'시리즈를 통해 표현하였다. '아이들'시리즈는 대부분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연관되어있다. 그것은 바로 축하공연의 한 장면이라는 것인데, 과연 무엇을 축하하는 것인가? 물론 앞서 이야기 했듯이 김일성을 숭배하고, 주체사상과 사회주의체제의 위대함을 교육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된 이러한 이미지는 그 목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선무가 그린 '아이들'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이번 전시에서 높이 194cm에 너비 130cm의 캔버스 5개(총 너비 650cm)가 한 작품인 「세상에 부럼없어라」를 벽에 걸지않고, 기대어서 바닥에 내려놓은 구성이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그 해답은 바로 이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서 찾을 수 있다. 선무는 어린시절 북한에서 실제 이러한 공연을 펼쳤던바 이것이 가지는 힘을 알고 있다. 아이들의 모습이 각인된 기억에서는 '굉장히 크고 아름답고 환상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무는 북한을 탈출하여 그 공연의 실체를 인식했고, 그 모습이 진실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그 모습을 직시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작은 아이들을 바라보고, 벽이라는 허공이 아닌,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그들과 함께 서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재현의 방식이 아니며 자기인식의 비판 또한 아니다. 그는 북한이라는 사회주의 체제의 비논리성에 대해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 폭로는 남한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관점들을 통해 비교된 양식이며, 두 체제가 가져다주는 갈등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선무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 또한 작품에 끌어들인다. 즉,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을 북한식 주체사실주의로 받아들이게 되는 왜곡과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다름아닌 타인들이 생활하고 있는 삶의 영역에서 함께 대화를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의도가 여기에 부합한다면 그가 소녀들을 등신대 크기로 그리고, 작품을 땅에 내려놓은 이유는 적정의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이 논리를 뒤집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벽에 기대어 바닥에 내려놓은 그의 작품 앞에 낮은 팬스가 쳐진다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보안을 위한 조치이기는 하나 해석을 확장시켜보자면 작품에서 선무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이 체제의 비논리성의 고발이나, 그것에 쉽게 다가갈 수 없음을 뜻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그 사실이 예술이라는 영역에 들어왔음을 뜻하는 것이고, 둘째, 북한이 체제의 비논리성을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쉽게 벗어버리지 못하는 자가당착적인 상황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고발이 예술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서서 미적이고 개념적인 차원에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며, 자가당착적 상황의 고발은 자신이 겪었고, 또한 겪고 있는 두 체제에서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구령에 발맞추고, 하나의 구령에 움직여야만 살 수 있는 곳. 나의 그리움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라고 말하는 선무의 눈빛 속엔 앞의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교차한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선무의 작품에 집중하다 보면 또 다시 두 가지의 물음들이 생긴다. "지금 선무는 어디에 있는가?" 또한 "선무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생일날 웃음 짓는 김정일의 추리닝 바지 ● 선무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앞서 설명한 '아이들' 시리즈는 선무의 전시에서 이제껏 보여준 이미지였다면, 이번 전시에 새롭게 선보인 「김정일」, 「생일날」, 「조선의 풍경」등은 더욱 풍부한 내용과 표현형식을 지닌다. 「김정일」은 짙은, 그래서 붉은 빛이 도는 핑크색의 나이키 점퍼에 갈색 옆 스프라이트 줄무늬 아디다스 추리닝 바지를 입고, 왼쪽으로 살짝 몸과 고개를 돌려 웃고 있는 모습이다. 화면에서 김정일은 마치 동네에서 담배 사러 나온, 배불때기 아저씨마냥 편안하고 익살스럽다. 허겁지겁 나왔는지 한 쪽 신발은 나이키, 다른 쪽은 아디다스 신을 신고 있다. 핑크색 바탕에 캐릭터 만화같이 등장한 김정일의 초상화는 발랄하다 못해 키치적으로 느껴진다. 그 모습은 배불뚝이 그 자체이다. 주체사상의 수장으로서의 김정일은 온데간데 없고, 익살스러운 백수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선무는 분명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을 것이다. 민족의 지도자로 인민대중의 혁명적 령도인 김정일을, 신성화되어 범접하기 힘든 그 인물을 선무는 마음대로 재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선무가 김정일을 그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김정일도 그렸고, 김일성도 그렸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재현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선무가 이번 전시에 보여준 「김정일」은 단순히 재현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상징적 오브제로써 작용한다. 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이자 풍자의 대상인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김정일에게 입혔다. 그리하여 김정일은 다시 사회주의를 살았던 선무에게 선망과 풍자의 대상이 된 것이다. 김정일이 입고 있는 점퍼의 오른쪽 어깨의 붉은 색에서 왼쪽 배의 흰색까지 연결된 변화의 빛은 김정일의 앞쪽에 강렬한 빛이 있음을 상정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김정일은 눈이 부신지 빛의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애써 웃음 짓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개를 돌려 빛을 바라보면 내가 짓는 웃음들이 한 순간에 일그러질텐데!' 라는 고민을 간직한 웃음 뒤에는 쇄국과 개방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북한의 현 실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베트남이 개방정책을 펼치고, 중국이 개혁을 외치는 새천년의 시대에 김정일은 여전히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웃음이 선무에게는 위태롭고 불안한, 그리하여 역설적인 분홍색으로 다가온다. 희망차고 환희에 찬 핑크는 소녀적인 꿈에 머물러 있게 한다.

그의 이러한 핑크빛 발랄함, 혹은 불안함은 「생일날」이라는 작품에 잘 표현되어 있다. 「생일날」은 태양절을 의미하는데 태양절(太陽節)은 1912년 4월 15일에 김일성이 출생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북한은 1962년 4월 15일 김일성의 50회 생일을 임시 공휴일로 정하였고, 1968년부터는 정식명절 공휴일로 제정하였다. 이후 1974년 김일성의 62회 생일을 기해 민족최대의 명절로 제정하고 각종 기념행사들을 대대적으로 개최하였고, 김일성 사망(1994.7.8) 3주기를 맞아 그의 생일을 태양절로 제정하였다. 김일성 생일 행사 준비를 위해 국민들은 갖가지 청소와 행사준비, 생산량 달성이라는 무거운 부담을 떠안으며, 고생 끝에 받아드는 것이 바로 명절공급명목으로 당에서 나오는 몇 가지 특식과 선물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일날」인민들에게 나오는 생일상이다. 짚으로 질끈 묶은 몇 근의 고기와 소주, 치약, 칫솔 등 생필품과 당에서 나오는 네모난 선물박스, 그리고 두 권의 교시노트(김일성-교시, 김정일-교시말씀)가 전부인 생일상은 그나마 인민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행복해야 할 선무의 「생일날」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정서를 전달한다. 각가지 선물들을 받쳐 들고 있는 상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오는 긴장감이 바로 그것이다. 상부의 복잡한 사물들과 하부의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을 끊임없이 갈라놓는다. 이것이 단순히 생일상을 재현한 것인가? 생일상을 지탱하는 탁자가 분홍 빛 탁자보에 가려져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그 위에 올려져있는 것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태양절에 받아든 「생일날」의 실체이다. 어린시절 알록달록 사탕들을 입에 물고 마냥 좋아하던 시절, 그 사탕은 달콤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 사탕이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인가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것은 결코 달콤할 수 가 없다. 선무가 바라본 북한의 모습이 바로 이 「생일날」과 같다. 수백만 명이 배고픔으로 죽어가도 빛깔 좋은 태양절 선물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주체사상의 나라, 핑크 빛 세계 유일의 부럼 없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선무의 기억 속 행복한 나라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동이죠", "세상에 부럼 없어라"를 아무리 외치고 외쳐도, 끊임없이 외칠 것이 남아 있는 세상이 바로 선무가 기억하는 그 나라인 것이다.

선무는 지금 세상에 부럼이 없을까? 단정하여 알 수는 없다. 더 큰 혼란 속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무가 작품활동을 통하여 자신이 알고 있던 '부럼'이라는 단어를 정의하고, 그것의 가치판단을 스스로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앞 글에서 물었던 물음, 선무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는 자신의 관점과 또 다른 자신의 관점들을 마주하고 있다. 그 마주함을 통하여 선무는 자신을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무를 바라보는 우리들은 과연 어디에 서 있는 것인가? 우리들은 선무의 작품을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는가? 이제 우리 자신들의 정의내림이 필요하다. 그 정의가 범주화 되어야 하는 것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또 다른 관점들을 따로 떨어뜨려 놓고, 나의 관점과 다시 마주하게 했을 때 비로소 선무의 작품이 우리들에게 말을 걸 것이다. 이제 조용히 선무의 우렁차면서도 속삭이는 핑크빛 이야기를 들어볼 시간이다. ■ 백곤


행복한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展

『행복한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展은 탈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위치한 '선무' 작가의 첫 개인전이다. ● 한국에 있어 분단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38선 이남에 위치한 우리들에게 분단이라는 현실은 언젠가부터 머릿속에서 지워진 현실이 되었고 북한의 사람들은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연히 남북분단은 현실이며 우리가 풀어야할 과제이다. 그 속에서 작가 선무의 목소리는 특별하다.

 

선무는 중국에서 라오스를 통해 7년전 한국으로 왔다. 아니 '남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것 같다. 북한에서 그림을 전공한 작가는 남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북한에서 배운 사실적인 화풍을 그려오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이야기... 그에게서 북한을 빼면 남는 것이 얼마일까? 그는 북한을 이미지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조선소년단원들 Boy members of Chosun boys, oil on canvas, 91x 200cm, 2008

화폭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작가에게 세상을 향해 북에 대한 부조리함을 토해내는 수단이자 그가 탈북과정에서 마주했을 죽음의 순간과 남한에 와서 느꼈을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트라우마에 대한 자기 치유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행복에 겨운 터질듯한 웃음을 띠고 있다. 그의 말로 태어나면서부터 빨간물 즉,'주체사상'의 물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다. 선무역시 그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벗어난 그는 그것이 행복이 아님을 안다. 그의 화면에서는 그곳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이 교차한다. 그럼 지금 그와 우리가 사는 이곳은 어떤가?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

그가 북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내는 가장 큰 이유는 통일이다. 북한의 부조리함을 가장 잘 알고 피부로 느낀 사람이면서도 미워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 오히려 내 고향과 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그는 '예술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라고 믿는다. 비록 그 힘이 미약할지라도 언젠가는 그의 염원이 북한에 전달되어 그곳에 남은 가족들이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선무(線無)'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선을 없앤다는 의미의 선무는 남과 북의 구분이 없는 하나의 세상을 염원에서 시작한다. 그곳에선 정치도 이념도 없다. 물리적 사선을 넘은 선무... 이제는 남한에서 보이지 않는 문화의 선, 편견의 시선도 뛰어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작가.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진 작가 선무로 살아남길 바란다. ■ 대안공간 충정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