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담에서는 신년기획초대전으로 선무작가의『뭐하니』전시를 마련하였다. 탈북화가로 잘 알려진 선무작가는 한국에서 선무라는 예명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번 전시는 열 한번째 개인전이다. 북한에서 탈북하여 김일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와 작가가 소망하는 유토피아를 그려내고 있다. 태어나면서 청년기까지의 학습된 곳에서 벗어나 환경이 전혀 다른 이곳에서 청년기를 보내면서 겪는 갈등들도 화면 속에 표출하고 있다.「뭐하니」라는 작업에서는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 또한, 아직 북한에 있는 모친에게도 부칠 수 없는 편지를 그린「편지」를 비롯하여, 언젠가 남북이 함께 갈 날을 소망하며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을 그린「우리 함께」, 어린 아이가 오랜 못이 박힌 문을 열어젖히는「문을 열다」는 작품 등 14여 점의 신작이 보여진다. 선무작가는 분단의 선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계층과 계급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들이 없어지기를 희망하며 작업을 하고 있다. 이미 해외에서는 많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선무작가는 인터내셔널해럴드트리뷴과 뉴욕타임지에 거푸 인상적인 기사와, 영국 BBC, 독일의 ARD, 미국의 Voice of America 등에서 비중있는 다큐멘타리에 등장하였다. ■ 갤러리 담
이사람 선무가 사는 법 ● 1. 지난 4월은 북한이 우주에 쏘아 올린 이상한 물건으로 온통 시끄러웠다. 북한은 인공위성을 실은 우주발사체라 말하고, 미국과 한국언론은 대륙간탄도탄을 위장한 로켓이라 한다. 여기에 가수 신해철이 “북한로켓발사를 경축한다”는 글을 올려 논란을 부추겼다. 여기서 필자는 어느 쪽을 옹호하고 싶지 않다. 이 지면은 날 선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상황에서, 이 상황을 미술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를 떠올릴 뿐이다. 이름은 선무. 가명이다. 그는 가명을 써야만 하는 사람이다. 한자로는 줄 線. 없을 無. 줄이 없다는 것. 여기서 줄이란, 무언가를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막는 것, 즉 장애물이다. 결국 그의 이름은 장애물이 없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놓여있는 장애물을 본인의 의지로 없애겠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장애물을 넘어온 사람이며, 그 장애물 때문에 가명을 써야만 하는 사람인 동시에 장애물을 없애겠다는 의지를 가명에 투사한 사람. 그가 바로 선무다. ● 흥미로운 건, 그가 현존하는 장애물을 없애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 혹은 무기란 고작 두 손, 그리고 손에 잡은 붓과 캔버스, 그리고 붓질을 조율하고, 그의 경험을 기록하고 호명하는 눈 뿐이다. 그렇다. 그는 화가일 뿐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화가가 보잘것없는 무기로 투쟁하려는 장애물이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점이다. 분단. 남북을 가로지른 넘지 못할 줄. 거대한 이념과 이념의 물적 장치인 수많은 살상기계들이 수많은 삶을 짓이겨 찢어 놓은 정치적 실재. 그것이 바로 선무의 장애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장애물을 설정하고 유지하는데 공헌한 북한체제와 그 우두머리를 상대로 투쟁하려는 것이다. 손에 붓 하나 꼭 쥔 채 말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07년 4월인 듯하다. 어느 작은 대안공간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창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불쑥 옆자리를 차지하고선, 생경한 억양으로, “선생의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하외다”하고 말을 붙였던 그 사람이다. 모자 챙 아래 살짝 어른거리는 그의 눈빛은 솔직히 나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우린, 서로 독한 시선과 몇 마디 말을 서로 던지고 받은 채 그날을 경험했다. 어딘지 불안한, 그 불안이 과도한 자신감으로 이글거리는 수척한 몰골의 그였다.
그랬던 선무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 해 가장 내가 참여했던 전시 가운데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노순택-선무 2인전, 우린 행복합니다』(호기심에 대한 책임감, 2007)이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고, 같은 해 대안공간 충정각에서 열렸던 1회 개인전이 강렬하게 회자되면서, 서로 잊지 않고 지내긴 했지만, 최근의 성장은 지극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실, 몇몇 콜렉터들 제외하면, 선무의 그림에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해외의 언론이었다. 지난 겨울, 인터네셔널해럴드트리뷴과 타임지에 거푸 인상적인 지면을 차지하더니만, 벌써, 영국 BBC, 독일의 ARD, 미국의 Voice of America 등에서 비중있는 다큐멘타리에 등장했다. 지난 3월에는 호주에서 개최된 북한관련 국제행사에서 북한의 현재를 회화로 증언하는 예술가의 한 명으로 참여했고, 내년엔 미국에서 비중 있는 전시를 앞두고 있다. 그는 이제 그는 그저 정치적 망명가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를 회화라는 방법으로 풀어내는 예술가로서 세상의 시선을 끌고 있다. ● 그는 삶의 경험은 그에게는 정치적 아픔을 동반하는 개인적 아픔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그 아픔을 붓 하나로 세상의 관심을 끌어내는 매력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건 매우 중요한데, 결국 붓 하나 꼭 쥔 그의 손이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기반한 정치적 모순에 맞서는 방법을 비로소 그가 찾아내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법이자, 가장 효과적인 방법 말이다. 그건, 그림의 매력으로 세상을 휘어잡고, 그의 삶의 아픔, 그 아픔을 초래한 정치적 모순을 세상의 관심 한 복판에 던지는 일이다. 그는 그 길을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을 객관적 지평에서 바라보는 평론가의 한 사람으로 이런 평가는 전혀 근거 없는 평가가 아니다. 그와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그저 돈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치적 이슈를 생산할 수 있는 국제언론, 정치인, 기관의 참여자들이다. 물론, 그가 그의 개인적 아픔과 분단의 모순을 상품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호히 자신의 작품을 아무에게나 판매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그림이 갖는 시장가치가 아니라, 선무가 사회와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사실, 선무의 그림들을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물론, 간단하지 않은 이유의 가장 큰 요소는 그가 정치적인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정치적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이 그랬고,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상한 형식들이 그러했다. 선무의 정치적 그림은 정치적 그림의 지평에서도 차별적이다. 선무는 대개의 정치적 그림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그림을 정치화시킨다. 이점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시작할 수는 있다. 즉, 그는 시각적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바’와 ‘의미하는 바’를 대립시킨다는 것이다. 이건, 좀 기호학적으로 복잡한 설명을 동반한다.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바를 ‘기표'(記票, signifier)라 한다면, 의미하는 바는 ‘기의(記意, signified)’라 할 수 있다. 대개의 정치적 그림은 기표와 기의의 직접성에 근거한다. 예컨대, 80년대 집회나 시위에 등장하는 걸개그림에서 불끈 쥐어진 팔뚝과 주먹(기표)은 있는 그대로 노동자 혹은 농민의 투쟁의 힘을 의미한다. 선무는 이런 기표와 기의의 직접적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무는 기표와 상반되는 기의를 설정한다. 이점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보이는 것 그대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선무는 보이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를 화면에 부여한다. 이러한 기호학적 화면구사는 선무의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난해하게 만든다. ● 예컨대, 선무가, 2007년 대안공간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에 김정일의 초상(「조선의 신」, 2007)을 걸었을 때, 가장 먼저, 가장 강렬하게 반응한 것은 주민들이었다. 어찌 김정일의 초상을, 그것도 청와대 지척인 부암동에 버젓이 걸어 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전시기간 내내 주민들의 항의와 신고가 이어졌다. 아마도 출동한 경찰의 수가 전시를 일부러 관람하기 위해 찾아오는 관객 수보다 많은 날도 있었다. 그렇다면, 기표와 기의를 쪼개려는 선무의 시도는 실패한 것이 아닐까? 적어도 주민들은 김정일의 초상을 보고, 적어도 선무가 김정일을 찬양할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어야 했다. 선무가 구사하는 기표-기의의 구사가 더 정교하게 나타나는 지점이 이곳이다. 선무는 그의 회화적 가능성의 공간을 기표에만, 혹은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에만 두고 있지 않다. 정작 선무는 자신의 의도를 기표로부터 분리된 기의 속에 숨겨 놓는다. 참, 이걸 쉽게 설명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만약, 이 글의 독자들이 필자가 구사하는 과도한 단순화를 용인해주기만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즉, 선무는 기표와 기의를 쪼개고, 쪼개진 기의를 다시 쪼갠다. 이걸 비평적인 담화로 표현하면, 글쎄, 시각적 기호의 이중적 분화라 할까? ● 선무는 김정일의 시각적 표현을 최대한 중립화한다. 그건 그저 사실적인 김정일의 얼굴일 뿐이다. 그저 무표정한 사실묘사일 뿐이다. 부암동 주민들은 과연 이렇게 중립화된 김정일의 초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정일은 적어도 남한 사회에서 이렇게 그려질 수 없다. 이 땅에서 단순한 사실묘사만으로 중립화되기엔 이 민족에게 저질러진 김정일의 죄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북한체제와 그 수괴로서 김정일을 비판할 의도라면, 그는 적어도 김정일에 머리에 괴물같은 뿔이라도 두어 개 그리고, 인민에게 집단구타라도 당하며 나뒹구는 그의 모습이라도 그렸어야 한다. ‘무찌르자 공산당’ 같은 문구라도 넣어서 말이다. 그러나, 선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무가 김정일을 미화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그렇게 그렸던 걸까? 물론,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의도는 어떻게 달성되는 걸까? 자신으로 하여금 넘지 못할 선, 사랑하는 가족들을 버리고, 수만 리를 지나 이 생경한 땅에 오도록 강요한 그 사회, 그 체제의 수괴에 대한 정치적 비판의 의도를 어떻게 달성하려는 것일까? 그는 그러한 의도를 철저하게 숨겨놓는다. 그렇다면, 어디에 어떻게 숨겼을까? 힌트는 김정일의 머리 위에 그려진 별이다. 북에서 별은 곧 최고권력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별은 가장 뾰족한 모서리를 김정일의 머리 정수리를 겨누고 있다. 별은 이미 선무가 정교하게 틀잡은 캔버스 틀에 의해 무참하게 잘려나가 있다. 북에서 별은 이렇게 그려질 수 없다. 그건 금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선무는 별의 가장 날카로운 끝으로 무방비 상태의 김정일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비판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적 형태를 통해, 정치적 분노를 가장 극한의 형식으로 밀어 붙이는 것이다.
3. 이런 방식은「세상에 부럼없어라1」(2006)에도 적용된다. 비교적 초기작에 해당하는 이 그림은 더 이상 기쁠 수 없는 북한의 어린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선무는 이 그림 아랫부분에 ‘우리는 행복합니다’라고 쓰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이 그림을 기표와 기의로 나눈다면, 기표는 희열에 빛나는 북한어린이며, 기의 역시 북한체제가 가져다 주는 행복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의미하고 싶었을까? 남한과 북한 사회를 모두 경험해 본 선무가 북한 체제에 향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만약, 북한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헐벗고, 굶주린 북한 어린이를 그렸다면, 그건 화가의 정체성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 현실의 회화적 변환이 성취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선무의 그림을 대할 때의 매력은 이 사람이 정치적 비판이 회화의 가능성의 공간을 따라 우회하는 방식을 추적하는데 있다. 선무가 숨겨놓은 비판을 정확하게 추적하기 위해선 롤랑 바르트가 제공하는 기호학적 개념, 즉 ‘외연'(外延, denotation)과 ‘내포'(內包, connotation)을 도입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 외연과 내포는 기의, 즉 기호의미를 좀더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한 도구일 수 있다. ● 외연이란 말 그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명시적 의미를 말한다. 체제와 김정일의 업적을 선전하는 북한의 아이가 기쁨에 겨워 밝게 웃고 있다면, 그 웃음+표정의 외연은 드러나는 것처럼 김정일의 위대함과 북한체제의 우월함이다. 반면, 내포란, 좀더 깊숙이 ‘숨겨진 의미’를 의미한다. 선무의 화가로서의 자질은 기호의 의미의 지평에서, 외연과 내포를 정확하게 대립되는 방식으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북한 어린이가 보여주는 기쁨과 희열의 외연은 김정일과 북한에 대한 극도의 찬양이지만, 내포는 그 찬양이 너무나도 극단적이라는 것, 그래서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현실의 가장 비현실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현실 속에서 가능하지 않음에 대한 일종의 은유적 고발이랄까? ● 소녀는 또래의 다른 소녀들이 도저히 그럴 수 없을 만큼 기뻐하고 있다. 이 기쁨이 과연 진실일까? 도저히 진실일 수 없는 진실, 그것은 혹여 가장된 위장일 가능성이 높다. 현실을 가상으로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을 현실화하는 위장이다. 현실을 가상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몇 마디의 말이면 충분하지만, 가상을 현실화하는 위장은 집단, 혹은 사회전체의 수준에서 위장을 강요하고 강화하는 강고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정작 기쁨에 겨워하는 북한 어린이를 그렸을 때, 선무가 숨겨놓은 내포는 그런 기쁨이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위장이며, 이 위장을 현실 속에서 가능케 하는 북한사회 체제가 갖는 불가해한 폭력성이라는 것이다. 결국 동일한 기표를 통해 상반된 외연과 내포를 서로 대립적으로 구성해 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선무가 보여주는 회화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기호학적 화면구성은 선무가 보여주는 그림들을 전반적으로 관통하고 있다. 사실 그는 사실적 묘사에 충실한 리얼리즘 화가이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의미를 다루는 정교한 기호학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다루고 처치하는 의미가 결국 사실을 재료로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을 통해 의미의 세계를 시각화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선무다.
4. 지난해 인사동 쌈지갤러리에서 열렸던 두 번째 개인전『세상에 부럼없어라』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전작들은 주로 선무가 북한에서 배웠던 선전화풍의 이미지 조직방식에 기초해 있다. 사실적인 묘사,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 붉은 색과 푸른 색 중심의 강렬한 색과 구도를 통해, 두만강을 건널 때의 분노와 절망, 불안을 그렸다면, 두 번째 개인전에선 드디어, 남한에서 익힌 소위 서구적 현대미술의 영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무엇보다 유머코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유머란 삶의 질곡을 뛰어 넘어 공동체를 형성하는 감성적 기반이기도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약자들의 무기이기도 하다. 유머란, 작은 웃음으로 굳고 강건한 덩치의 적에게 무시할 수 없는 균열을 내는 예술적 무기라는 것이다. 나이키 운동복과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서 뒤뚱거리며 우스꽝스운 표정을 짓는 김정일. 이건 단순한 불경이나 조롱이 아니다. 선무는 김정일의 존재와 권위를 우스꽝스럽게 희화화시킨다. 그는 그저 광대처럼 경망스럽게, 익살스럽게 웃고 있다. 물론, 선무가 구사하는 유머는 폐부를 찌르는 양가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비판적 함의는 개혁 개방을 거부하면서도, 그 자신은 세계적인 상품으로 사치를 즐기는 김정일을 희화화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러나 비판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림 속의 김정일은 행복해 보인다. 이 모습은 선무의 그림에서 언제나 굳은 표정을 짓던 독재자가 아니다. 독재자는 과잉 집중된 권력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바로 그 권력 때문에 언제나 그 누구보다 불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권력이 주는 거만함과 불안함은 선무의 그림 속에서 김정일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런데 서양의 품질 좋은 상품들로 치장한 김정일의 표정에는 그러한 거만과 불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무의 그림 속에서 김정일은 행복해 보인다. 이 행복한 표정이 던지는 정치적 함의는 무엇일까? 선무는 그림 속 김정일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한 걸까? 어쩌면, 선무는 개혁 개방이 인민을 위하는 길일 뿐 아니라, 김정일 자신에게도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비판이건, 정치적 요구이건, 선무는 자신의 의도를 유머코드를 통해, 회화적 의미의 지평에서 효과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정치적인 비판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외양으로 던져 놓은 이 작품의 재미는 이후 다양한 매체들의 관심을 끌었고, 세계에 전달되었다. 이 밖에 특정한 오브제를 형태적으로 반복팝아트의 형식 또한 관찰된다. 마릴린 먼로, 코카콜라, 브릴로 박스와 같은 대중문화의 오브제들을 무한히 반복함으로써 화면을 채워나갔던 엔디워홀의 경우처럼, 선무 역시 그가 집착하고 있던 북한 어린이의 모습을 질서정연하게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남한 사회에서의 생경한 자본주의적 경험들을 북한에서의 경험과 병치하는 방식들도 눈에 띈다. 특히, 전라, 혹은 반라의 여성누드와 인공기를 병치하는 방식은 보다 강렬한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것은 북한체제에 대한 모독적인 불경인 동시에 좀 더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을 존중하는 사회에 대한 갈망일 수 있다. 선무의 회화적 방법이 진화하는 과정은 미술이 그저 미술일 수만은 없음을 보여준다. 미술은 투쟁이다. 미술은 과거의 미술에 대한, 미래의 미술을 위한 투쟁일 뿐 아니라, 미술이 사회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름의 변화와 변혁을 요구하는 정치적 투쟁이기도 하다. 선무는 이 정치적 투쟁을 미학적인 방식으로 변환할 뿐 아니라, 그 역의 변환 역시 시도하고 있다. 즉 미학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투쟁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 미학적이자 정치적 투쟁의 거대한 지형은 정작 선무라는 한 작가의 손에 잡힌 작은 붓 한 자루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선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경색된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데 어떤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정작 이 시대,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장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남북은 그저 피 흘리며 싸우는 대립적 투쟁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그려지는 모든 상황들은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와야 할 것들이다. 그의 그림이 현실과 조응하며, 세상을 바꾸고, 세상과 함께 바뀌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동시대 미술장에 참여하는 관객에겐 일종의 행운이라 할 수 있다. ■ 김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