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빛 속삭임의 노래 『세상에 부럼없어라』 ● 2008년 새해 설날을 맞아 북한에서는 갖가지 크고 작은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는 당의 주요 인사들과 외교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학생소년들의 설맞이 모임인 『세상에 부럼없어라』 공연이 펼쳐졌다.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말은 북한 주체사상의 선전표어로 모든 분야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하늘은 푸르고 내 마음 즐겁다 손풍금 소리 울려라 / 사람들 화목하게 사는 내 조국 한없이 좋네 / 우리의 아버진 김일성 원수님 우리의 집은 당의 품 / 우리는 모두다 친형제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노래가사는 북한의 사회주의체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말은 ‘세상에 좋은 일만 항상 있으라’라는 뜻이다. 즉, 김일성 수령님 밑 사회주의 세상에서는 언제나 행복한 일만 있다는 말인데, 이 노래를 들으면 왠지 모를 씁쓸한 서글픔이 밀려온다. 밥 한그릇 먹지 못해서 죽어가는 이가 수두룩하고 한 해에도 수천 명의 이탈국민이 생겨나는 상황에서, 또 국가는 여러 가지 차관을 위해 폐기된 핵시설을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펼칠 수 밖에 없는 현실 위에서 이 노래는 과연 누구를 위해 불려지고 있는가? 개혁, 개방을 하고 싶어도 쉽게 할 수 없는 21세기 사상누각의 대명사가 된 북한이 스스로의 체제를 존속시켜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불러재끼는 노래가 바로 ‘세상에 부럼없어라’이다. 이를 악물고 정해진 웃음을 지으며, 연습한 동작을 펼치는 어린아이들의 얼굴 그 어디에도 부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얼굴은 마치 “우리는 왜 이렇게 불행할까요?”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어설픈 키치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렇다면 북한 어린이를 바라보는 우리들은 과연 행복한 것일까? 그네들의 반대편에서 가엾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들의 부럼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진정 행복한가? 선무의 이번 전시 『세상에 부럼없어라』는 이러한 물음들에서부터 시작한다.

생일날 아침 Birthday morning, oil on canvas, 130 x 162cm, 2008

 

생일날 Birthday, oil on canvas, 91 x 116cm, 2008

선무, 남한예술을 시작하다 ● 2002년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넘어 온 선무라는 개인이 예술가가 되어 예술행위를 펼쳤을 때 남한 사람들의 시선은 관심 그 자체였다. 많은 언론에서 그를 인터뷰하고, 그와 그의 작품을 소개했으며, 미술계 여기저기에서 찾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왜일까? 그의 작품이 예술적으로 대단해서였을까? 아니다. 선무가 탈북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결코 경험해 볼 수 없는 탈북이라는 달콤한 소스에, 언제나 먹고 싶은 예술이라는 난해함이 만나 적정의 하모니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의 중심에 바로 선무가 있다. 이제는 탈북해서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들에 대한 국가적 환영의 시대는 지났다. 왜냐하면 한 해에도 수 천명의 탈북자가 남한으로 들어오고 있는 사회적 부담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의 흡수통일에 대한 선례에서 오는 우려와 한국인으로 살아가기에 너무나 버거운 현실에서도 탈북은 여전히 관심거리다. 그 관심의 표면을 벗겨내면 무엇이 있을까? 거기엔 약간의 우월감과 거리감, 그리고 비교대상으로써 ‘그는 어떠한 생각을 할까’라는 호기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인가? 선무가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가? 물론 선무가 겪은 특수한 상황을 바라보는 동정의 관심이 그와 그의 작품을 잘못 이해하는 덫이 될 수도 있다. 아시아의 블루칩 중국미술의 싹쓸이가 자본주의의 배는 채워줬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삶을 생각하고, 이용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써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그리고 그들의 작품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여기 북한출신 작가 선무가 있다. 어떤 이는 그를 희소성의 경제적 가치로 볼 것이고, 또 다른 이는 그를 소외자, 혹은 이방인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아야 할 선무는 스스로의 삶을 영위해나가면서 자신의 기억과 자신이 겪은 경험들의 파편들을 끄집어내어 정리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의 선무이다. 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도 아니며, 언론 미디어의 좋은 기사거리 또한 아니다. 그는 이 땅을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 중 예술활동을 하는 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이 정리되었다면 이제 그의 이야기를, 그가 작품에서 풀어내는, 작품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볼 준비가 되었다. 그럼 화가 선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이들의 지저귐 『세상에 부럼없어라』 ● 앞서 선무의 이번 전시가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물음들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의 작품 「세상에 부럼없어라」는 아이들이 손잡고 즐겁게 노래 부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북한의 축하공연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하얗고 정갈한 레이스 셔츠에 남색치마를 두른 소녀들이 팔 벌려 손잡고, 입을 크게 벌리고 명랑한 노래를 부르는 생동감은 그것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생동감 있는 진실성을 표현하고자 소녀들을 등신대로 그렸다. 아마 처음에는 더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성인의 크기에 맞게 그렸을 것이다. 아이들의 머리 위, 파란색 배경으로 뒤덮힌 곳에는 얼굴의 흔적들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작가는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노래를 어릴 적부터 부르면서 컸고, 많은 축하공연을 보았다고 한다. 어릴 때 바라보던 누나들의 맑고 우렁찬 노래는 소년 선무의 귀와 눈에 환상적인 소리와 이미지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한 환상은 언제나 기억 속에 더 큰 이미지로 각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북한 주체사상의 선전으로 끊임없이 불려 질 때 인간의 감각은 무디어 진다. 자신이 알고 있던 관점과의 비교 군이 없기 때문에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진실이 된다. 나아가 이러한 기억들은 기념비적인 크기로서 자신의 실제 기억을 억누른다. ‘그래 그 때 보았던 것이 정말 크고 웅장했지! 아마 집채만 했을 걸!’식의 기억들은 자신의 기억을 왜곡시키고 자신의 행동을 영웅화시키기에 이른다. 물론 그 믿음이 처음에는 주저하는 시기가 있다가, 나중에는 진정으로 그것을 사실로 믿게 된다. 이것이 바로 증폭되는 거짓말의 원리이다. ‘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사회주의 선전표어와 김일성 우상화는 북한에서 태어나 자라는 어린이들에게는 진실 그 이상의 진실, 즉 사실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파간다의 논리이다. 선무는 바로 이러한 선전의 상황들을 ‘아이들’시리즈를 통해 표현하였다. ‘아이들’시리즈는 대부분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연관되어있다. 그것은 바로 축하공연의 한 장면이라는 것인데, 과연 무엇을 축하하는 것인가? 물론 앞서 이야기 했듯이 김일성을 숭배하고, 주체사상과 사회주의체제의 위대함을 교육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된 이러한 이미지는 그 목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선무가 그린 ‘아이들’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이번 전시에서 높이 194cm에 너비 130cm의 캔버스 5개(총 너비 650cm)가 한 작품인 「세상에 부럼없어라」를 벽에 걸지않고, 기대어서 바닥에 내려놓은 구성이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그 해답은 바로 이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서 찾을 수 있다. 선무는 어린시절 북한에서 실제 이러한 공연을 펼쳤던바 이것이 가지는 힘을 알고 있다. 아이들의 모습이 각인된 기억에서는 ‘굉장히 크고 아름답고 환상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무는 북한을 탈출하여 그 공연의 실체를 인식했고, 그 모습이 진실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그 모습을 직시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작은 아이들을 바라보고, 벽이라는 허공이 아닌,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그들과 함께 서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재현의 방식이 아니며 자기인식의 비판 또한 아니다. 그는 북한이라는 사회주의 체제의 비논리성에 대해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 폭로는 남한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관점들을 통해 비교된 양식이며, 두 체제가 가져다주는 갈등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선무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 또한 작품에 끌어들인다. 즉,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을 북한식 주체사실주의로 받아들이게 되는 왜곡과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다름아닌 타인들이 생활하고 있는 삶의 영역에서 함께 대화를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의도가 여기에 부합한다면 그가 소녀들을 등신대 크기로 그리고, 작품을 땅에 내려놓은 이유는 적정의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이 논리를 뒤집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벽에 기대어 바닥에 내려놓은 그의 작품 앞에 낮은 팬스가 쳐진다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보안을 위한 조치이기는 하나 해석을 확장시켜보자면 작품에서 선무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이 체제의 비논리성의 고발이나, 그것에 쉽게 다가갈 수 없음을 뜻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그 사실이 예술이라는 영역에 들어왔음을 뜻하는 것이고, 둘째, 북한이 체제의 비논리성을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쉽게 벗어버리지 못하는 자가당착적인 상황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고발이 예술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서서 미적이고 개념적인 차원에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며, 자가당착적 상황의 고발은 자신이 겪었고, 또한 겪고 있는 두 체제에서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구령에 발맞추고, 하나의 구령에 움직여야만 살 수 있는 곳. 나의 그리움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라고 말하는 선무의 눈빛 속엔 앞의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교차한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선무의 작품에 집중하다 보면 또 다시 두 가지의 물음들이 생긴다. “지금 선무는 어디에 있는가?” 또한 “선무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생일날 웃음 짓는 김정일의 추리닝 바지 ● 선무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앞서 설명한 ‘아이들’ 시리즈는 선무의 전시에서 이제껏 보여준 이미지였다면, 이번 전시에 새롭게 선보인 「김정일」, 「생일날」, 「조선의 풍경」등은 더욱 풍부한 내용과 표현형식을 지닌다. 「김정일」은 짙은, 그래서 붉은 빛이 도는 핑크색의 나이키 점퍼에 갈색 옆 스프라이트 줄무늬 아디다스 추리닝 바지를 입고, 왼쪽으로 살짝 몸과 고개를 돌려 웃고 있는 모습이다. 화면에서 김정일은 마치 동네에서 담배 사러 나온, 배불때기 아저씨마냥 편안하고 익살스럽다. 허겁지겁 나왔는지 한 쪽 신발은 나이키, 다른 쪽은 아디다스 신을 신고 있다. 핑크색 바탕에 캐릭터 만화같이 등장한 김정일의 초상화는 발랄하다 못해 키치적으로 느껴진다. 그 모습은 배불뚝이 그 자체이다. 주체사상의 수장으로서의 김정일은 온데간데 없고, 익살스러운 백수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선무는 분명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을 것이다. 민족의 지도자로 인민대중의 혁명적 령도인 김정일을, 신성화되어 범접하기 힘든 그 인물을 선무는 마음대로 재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선무가 김정일을 그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김정일도 그렸고, 김일성도 그렸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재현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선무가 이번 전시에 보여준 「김정일」은 단순히 재현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상징적 오브제로써 작용한다. 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이자 풍자의 대상인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김정일에게 입혔다. 그리하여 김정일은 다시 사회주의를 살았던 선무에게 선망과 풍자의 대상이 된 것이다. 김정일이 입고 있는 점퍼의 오른쪽 어깨의 붉은 색에서 왼쪽 배의 흰색까지 연결된 변화의 빛은 김정일의 앞쪽에 강렬한 빛이 있음을 상정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김정일은 눈이 부신지 빛의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애써 웃음 짓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개를 돌려 빛을 바라보면 내가 짓는 웃음들이 한 순간에 일그러질텐데!’ 라는 고민을 간직한 웃음 뒤에는 쇄국과 개방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북한의 현 실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베트남이 개방정책을 펼치고, 중국이 개혁을 외치는 새천년의 시대에 김정일은 여전히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웃음이 선무에게는 위태롭고 불안한, 그리하여 역설적인 분홍색으로 다가온다. 희망차고 환희에 찬 핑크는 소녀적인 꿈에 머물러 있게 한다.

그의 이러한 핑크빛 발랄함, 혹은 불안함은 「생일날」이라는 작품에 잘 표현되어 있다. 「생일날」은 태양절을 의미하는데 태양절(太陽節)은 1912년 4월 15일에 김일성이 출생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북한은 1962년 4월 15일 김일성의 50회 생일을 임시 공휴일로 정하였고, 1968년부터는 정식명절 공휴일로 제정하였다. 이후 1974년 김일성의 62회 생일을 기해 민족최대의 명절로 제정하고 각종 기념행사들을 대대적으로 개최하였고, 김일성 사망(1994.7.8) 3주기를 맞아 그의 생일을 태양절로 제정하였다. 김일성 생일 행사 준비를 위해 국민들은 갖가지 청소와 행사준비, 생산량 달성이라는 무거운 부담을 떠안으며, 고생 끝에 받아드는 것이 바로 명절공급명목으로 당에서 나오는 몇 가지 특식과 선물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일날」인민들에게 나오는 생일상이다. 짚으로 질끈 묶은 몇 근의 고기와 소주, 치약, 칫솔 등 생필품과 당에서 나오는 네모난 선물박스, 그리고 두 권의 교시노트(김일성-교시, 김정일-교시말씀)가 전부인 생일상은 그나마 인민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행복해야 할 선무의 「생일날」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정서를 전달한다. 각가지 선물들을 받쳐 들고 있는 상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오는 긴장감이 바로 그것이다. 상부의 복잡한 사물들과 하부의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을 끊임없이 갈라놓는다. 이것이 단순히 생일상을 재현한 것인가? 생일상을 지탱하는 탁자가 분홍 빛 탁자보에 가려져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그 위에 올려져있는 것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태양절에 받아든 「생일날」의 실체이다. 어린시절 알록달록 사탕들을 입에 물고 마냥 좋아하던 시절, 그 사탕은 달콤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 사탕이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인가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것은 결코 달콤할 수 가 없다. 선무가 바라본 북한의 모습이 바로 이 「생일날」과 같다. 수백만 명이 배고픔으로 죽어가도 빛깔 좋은 태양절 선물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주체사상의 나라, 핑크 빛 세계 유일의 부럼 없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선무의 기억 속 행복한 나라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동이죠”, “세상에 부럼 없어라”를 아무리 외치고 외쳐도, 끊임없이 외칠 것이 남아 있는 세상이 바로 선무가 기억하는 그 나라인 것이다.

선무는 지금 세상에 부럼이 없을까? 단정하여 알 수는 없다. 더 큰 혼란 속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무가 작품활동을 통하여 자신이 알고 있던 ‘부럼’이라는 단어를 정의하고, 그것의 가치판단을 스스로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앞 글에서 물었던 물음, 선무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는 자신의 관점과 또 다른 자신의 관점들을 마주하고 있다. 그 마주함을 통하여 선무는 자신을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무를 바라보는 우리들은 과연 어디에 서 있는 것인가? 우리들은 선무의 작품을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는가? 이제 우리 자신들의 정의내림이 필요하다. 그 정의가 범주화 되어야 하는 것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또 다른 관점들을 따로 떨어뜨려 놓고, 나의 관점과 다시 마주하게 했을 때 비로소 선무의 작품이 우리들에게 말을 걸 것이다. 이제 조용히 선무의 우렁차면서도 속삭이는 핑크빛 이야기를 들어볼 시간이다. ■ 백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