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말 중국 베이징의 웬덴미술관(元典美術館), 탈북 미술가 선무(線無·44)의 개인전 ‘홍·백·남(紅·白·藍)’ 개막식은 아수라장이 됐다. ‘탈북인을 소환하겠다’는 북한대사관의 신고를 받고 중국 공안들이 들이닥쳐 작품 80여 점, 도록 1000부를 압수했다. 선무를 보러 온 한국의 미술계 인사들도 ‘전시장에 오지 마세요’ 다급히 스마트폰 사발통문을 돌렸다. 선무는 황급히 귀국했다.

국립현대·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수용소·김정일·강성대국 빗댄 작품
북한 그림·사진 전시장 바닥에 깔아
북에 가족 있어 이름·얼굴 감춰
작업대 위엔 남·북 소주 함께 놓여

선무는 탈북 화가다. 북한에 남은 가족이 걱정돼 얼굴과 이름을 가리고 활동한다. ‘화가 선무’로 알려진 지금도, 나라도 이름도 없이 잡혀갈까 두려워하며 지냈던 제3국 시절을 잊지 않는다. 평화와 기쁨, 희망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며 오늘도 작업실로 출퇴근한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98년 배고픈 가족들에게 돈과 식량을 가져다 준다는 중국의 친척을 기다리다가 두만강을 건넌 게 영이별이었다. 중국·라오스·태국을 거쳐 2002년 한국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미대생이던 그는 한국에 들어와 홍익대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국에 갈 때마다 이름도 나라도 없이 고생하던 시절 생각이 났다. 그래서 베이징 개인전에 더 의미를 뒀다. “일주일이라도, 하루라도 멋있게 전시하자고…. 쉽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저렇게까지 무지막지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12년이 지났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어디에도 그의 나라는 없었다. 선무는 가명이다. 북에 남은 가족을 생각해 얼굴도 이름도 가리고 활동한다. 선(휴전선)이 없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무선(無線)’이라고 이용백 작가가 지어준 이름을 뒤집어서 쓴다.


선무의 작업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선무다’라는 그림에서 비애와 정체성 혼란이 보인다. [권근영 기자]

광복 70주년은 곧 분단 70주년이기도 하다. 이를 돌아보는 전시가 곳곳에서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의 ‘북한 프로젝트’ 등 주요 국·공립미술관 두 곳에서 동시에 초대받은 미술가는 선무가 유일하다. 서울관에 쏟아져 나온 270여 점 중 마지막으로 걸린 것이 바로 선무의 그림이다. 북한의 선전 포스터 형식을 본떠 소년 소녀가 일사불란한 군무를 선보이는 장면 아래 ‘우리는 평화를 원해요’라고 썼다. ‘우리가 평화로우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반문하는 듯한 이 그림을 화두처럼 안고 관객들은 전시장을 나온다. 서울시립미술관은 금기시됐던 ‘북한’을 아예 주제로 내걸었다. 북한 유화와 포스터, 우표, 그곳 사진이 대거 전시됐다. 선무의 작품은 그 사이, 바닥에 깔려 있다. ‘정치범 수용소’ ‘김정일’ ‘강성대국’ 등을 나무판마다 새겼다. 그걸 밟고 지나가야 북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철책선이 한강변을 두르고 있는 행주산성 인근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방마다 빨갛고 파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교복 입은 어린이들이 한껏 미소지으며 율동하는 그림 아래엔 ‘세상에 부럼(부러움) 없어라’라고 적었다. 행복을 가장하고 과장하는 어린이들의 한결같은 표정을 보면, 이곳의 미래가 오싹하다. 선무는 작업대 위에 평양 소주와 참이슬을 나란히 놓고 데생하고 있었다. “남과 북의 사람들이 앉아서 한잔씩 나누면 참 좋겠다. 대동강 맥주와 남한 소주로 폭탄주도 만들어 먹으면 얼마나 재미있겠나.” 퍽 단순한데 절절하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슈피겔·BBC 등 해외 언론의 인터뷰가 이어지지만, 그의 그림은 전시 때마다 환대와 박대 극단을 오간다. 2008년 부산 비엔날레에는 그가 그린 김일성 초상화가 철거됐다. 서울 전시 때는 주민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다. “나는 어느 한 편에 서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동안 내가 어떤 조직이나 독재자를 위해 프로파간다를 해 왔다면, 이제는 나를 위한 프로파간다를 한다. 지구인이라는 생각으로 두 지역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한에서 결혼해 낳은 두 딸을 보며, 자신의 어릴 적 모습 그리고 이제는 꽤 컸을 북의 조카를 떠올린다. 이 아이들이 북에 살았다면 어떤 모습일까. “예술계에서는 인간의 차별이나 높고 낮음, 계급 이런 게 중요치 않은 것 같다. 이 세상에 예술이란 장이 있고, 그 안에서 내 생각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거다.”

작업실 천장엔 태극기와 인공기 그림이 서로 칭칭 묶인 채 천장에서부터 드리워져 있었다. “베이징 전시 오프닝 때 아이들이 이걸 푸는 퍼포먼스를 하려 했는데….” 겪어온 시간에 회한도 미움도 많겠지만 그의 눈은 미래를 향한다. “예술이 세상에 얼마나 영향을 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선무(線無)=북한 태생. 1980년대 TV에서 김일성이 그림 그리는 아이들을 독려하는 장면을 보며 화가 꿈을 키웠다. 98년 탈북해 홍익대 회화과(2007)와 동대학원(2009)을 졸업했다. 2007년 노순택·선무 2인전 ‘우리는 행복합니다’(호기심에 대한 책임감 갤러리)를 시작으로 ‘세상에 부럼없어라’(갤러리 쌈지, 2008), ‘Korea Now’(상상마당 갤러리, 2009), ‘선을 넘다’(주한 유럽상공회의소 사무실, 2011) 등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Via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