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국경도 얼굴도 없는 탈북화가, 나는 선무다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국내외서 가장 비싼 탈북화가

北서 배운 프로파간다 미술로 그곳의 '최고 존엄' 조롱
"처음엔 김정일 그리는데 붓이 떨렸어요, 너무 무서워서"
참이슬·대동강맥주 그려놓곤 "통일 폭탄주인데, 맛이 좋습니다"

국내외에서 작품 값이 가장 비싼 탈북 화가 선무가 작업실에서 ‘너는 누구냐2’(190×130㎝)를 붙잡고 서 있다. 불온한 붉은색 바탕에 미키마우스를 그려넣어 북한 지도자 김정은을 풍자했다. 얼굴을 공개할 수 없어 마스크를 쓴 선무는 “천장에서 비가 샌 흔적이 남은 그림”이라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기에 더 멋이 있다”고 했다.
국내외에서 작품 값이 가장 비싼 탈북 화가 선무가 작업실에서 ‘너는 누구냐2’(190×130㎝)를 붙잡고 서 있다. 불온한 붉은색 바탕에 미키마우스를 그려넣어 북한 지도자 김정은을 풍자했다. 얼굴을 공개할 수 없어 마스크를 쓴 선무는 “천장에서 비가 샌 흔적이 남은 그림”이라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기에 더 멋이 있다”고 했다. / 김지호 기자

1998년 10월 두만강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건너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는 담배밭에 숨어 밤이 오길 기다렸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불안과 공포 속에 강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북한 쪽 수심은 얕아요. 중국으로 가까이 갈수록 툭 떨어졌습니다. 거기서부터는 헤엄을 쳤어요."

'얼굴 없는 화가' 선무(線無·46)는 20년 전으로 돌아간 표정이었다. 등유 난로에 올려놓은 주전자가 김을 내뿜고 있었다. "북한에서 살 땐 심장도 내 것이 아니었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가슴팍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휘장을 달고 다녔지요. 탈북(脫北)하곤 떼어 버렸어요. 이제 심장은 저를 위해서만 뜁니다."

그는 국내외에서 작품값이 가장 비싼 탈북 화가다. 얼굴도 본명도 숨긴 채 살고 있다. "북에 남은 부모형제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무'라는 가명은 '경계도 국경도 없다'는 뜻이다.

지난달 5일 행주산성 근처 작업실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즐비했다. 최고 존엄은 그의 붓끝에서 우스꽝스러워진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미키마우스, 팅커벨 같은 디즈니 만화 캐릭터들이 붉은 망토 입은 김정은을 포위한 그림을 그려놓곤 '벗고 놀자'란 제목을 붙이는 식이다. 북에서 배운 프로파간다(정치 선전) 미술로 그곳 지배자를 조롱한다. 선무는 "이제는 김일성·김정일이 하라는 대로 그리지 않고 나를 위한 프로파간다를 한다"고 했다. '같은 스타일로 생각만 다르게'하는 셈이다.

흘림체 ‘나는 선무다’. 선무가 붓으로 쓴 필체다.
흘림체 ‘나는 선무다’. 선무가 붓으로 쓴 필체다.

'천국'의 국경을 넘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북한 삐라(대남 전단) 같은 포스터가 보였다. 남한 소주 참이슬과 북한 대동강맥주를 나란히 그려놓곤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폭탄주를 마시자'라고 적었다. "저게 '통일 폭탄주'인데 맛이 아주 좋습니다"라며 그가 커피를 건넸다.

―북한에서도 커피 드셨나요.

"커피라는 말도 몰랐죠. 맛은 지금도 몰라요(웃음)."

―왜 탈북했는지요.

"고향이 황해도인데 중국에 친척이 있었어요. 너무 배가 고파 돈이나 물건을 건네받으러 올라갔지요(1994~1998년 북한은 기근이 극심했다). 여행증명서는 함북 청진까지만 받고 숨어서 두만강변까지 갔고, 돈 받고 재워주는 민가에서 전화를 걸었어요. 그런데 중국 친척이 '국경 감시가 강화돼 지금은 위험하니 돌아가라'는 거예요. 주머니에 돈도 없고 집에 가다간 개죽음당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요?

"여기까지 온 김에 강을 건너보자, 무작정 떠난 겁니다. 안전한 경로를 일러줄 브로커도 제겐 없었어요."

―북한이 싫어 도망친 건 아니군요.

"과거의 저는 김일성·김정일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던 놈이에요. 그게 전부였으니까. 중국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믿었던 게 다 허상이고 가짜라니. 이젠 제가 북한에 살았다는 사실이 신기해요. 사회를 저런 식으로 끌고 간다는 게 기가 막히죠."

―중국에선 어떻게 살았나요.

"나무껍질도 벗기고 담배 수매하는 곳에서 잡일도 했어요. 잠깐이지만 건달로도 살았고요. 조선족들은 '야, 너네는 배곯잖아. 강택민(장쩌민)이 봐. 우리는 그래도 배불러' 하면서 탈북자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처음엔 '이 자식들이 제정신인가' 했어요. 북한에서 나와 보니 김일성·김정일은 욕만 먹고 잘한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길바닥에 걷어차이는 자갈처럼요?

"딱 그런 꼴이었죠. 중국에서 남한 사람은 우러러보는데 북한 사람은 숨어다녀야 했어요. 남한에서 온 사업가들 주머니 털 생각을 하는 놈들도 많았습니다. 혼란스러웠어요."

―한국엔 어떻게 들어왔나요.

"중국은 싫고 불법체류자 신세라 남한 국적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2001년 말에 들어왔습니다. 라오스에선 감옥에 갇힌 적도 있는데 'I am from South Korea'라고 했더니 남한 대사관에 연락한 거예요. 태국에 머물 때 선교사가 '남한 사회는 혈연·지연·학연이 있어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저는 학연을 붙잡기로 했습니다."

이념의 옷을 벗고 세계와 함께 놀자는 뜻을 담은 그림 ‘벗고 놀자’(130×190㎝). 김정은이 디즈니 만화 캐릭터들에 포위돼 있다.
이념의 옷을 벗고 세계와 함께 놀자는 뜻을 담은 그림 ‘벗고 놀자’(130×190㎝). 김정은이 디즈니 만화 캐릭터들에 포위돼 있다. / 선무 제공

"눈 감으면 북한, 눈 뜨면 남한"

홍익대 회화과 03학번으로 입학했다. 탈북자의 학비는 정부와 대학이 반반씩 댔다. 그는 "대학원은 대출받아 다녔는데 졸업한 뒤 작품이 잘 팔려 금방 다 갚았다"고 했다.

―북에서도 화가가 꿈이었나요?

"해마다 12월 31일이면 전국에서 예술적으로 재능 있는 아이들을 뽑아다 공연을 합니다. 김일성이 걔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TV로 봤어요. 나도 미술로 지도자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지요. 군복무 할 땐 우리 대대(大隊)의 역사와 김일성이 지도한 내용을 그림으로 그렸어요."

―한국땅 밟을 때 첫인상은 어땠나요?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중국이나 태국과는 달랐습니다. 되게 깨끗한 게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국정원 가면 두들겨 패면서 조사한다'고 들었는데 그렇진 않더라고요."

―처음 정착한 곳은요.

"(충남) 공주요. 1지망은 다들 서울입니다. 저도 그랬는데 광주비엔날레를 들어봐서 2지망을 광주로 쓴다는 게 그만 공주를 적었어요."

―홍익대에서 만난 청년들은 어떻던가요.

"신입생 환영회부터 충격의 연속이었죠. 배알대로 장기자랑을 하라는데 저는 막막해서 맥주병을 깼습니다(웃음). 수강 신청도 낯설었어요. 북한과 달리 선택해야 해 괴로웠고 책임이 뒤따라 두려웠죠. 동기들이 띠동갑인데 '형, 우리 한잔해요'가 지나가는 말이더라고요. 저는 그걸 진짜로 받아들여서 오해도 생겼죠. 처음엔 김정일을 그렸습니다. 붓이 떨렸어요. 이놈을 그려야 하는데, 그게 내 전부였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봤어요."

―왜죠?

"북한에선 함부로 김일성·김정일을 그릴 수 없으니까. 이래도 되나 싶고 무서웠습니다."

―탈북 20년이니 적응은 끝났겠지요.

"아직도 이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입니다. 북에서 받은 세뇌를 쉽게 떨칠 순 없어요. 탈북자 대부분이 그럴 겁니다. 북한에도 '자유'라는 말은 있지만 정권이 그어놓은 선 안에서의 자유일 뿐이죠. 탈북 초기엔 '눈 감으면 북한, 눈 뜨면 남한'이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남한에 들어와 5년 동안은 매일 북한에 가 있는 꿈을 꿨어요. 밤마다 김일성·김정일에게 쫓겨요. 눈 뜨면 한숨이 나오죠. 요즘에는 1년에 한 번 정도로 줄었습니다. 육체적인 탈북보다 심리적인 탈북이 훨씬 오래 걸렸어요."

병상에 누워 있는 김정일에게 소녀가 콜라를 주는 ‘약 드세요’.
병상에 누워 있는 김정일에게 소녀가 콜라를 주는 ‘약 드세요’. / 선무 제공

"한국 외교, 중국에 더 당당해져야"

2015년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 '나는 선무다'(감독 아담 쇼베르그)는 그를 다룬 영화다. 명절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두 소녀가 보인다. 그런데 철조망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 그림 제목은 '할머니'. 선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딸들이 물어요. 우리 할머니는 어디 있냐고. '윗동네'에 있는데 갈 수 없는 상황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이곳에선 가족이 어떻게 되나요.

"중국에서 조선족 여인을 만났고 한국에 들어온 뒤 결혼했어요. 여덟 살, 열한 살 난 딸이 둘 있습니다."

―북에 남은 부모형제와는 연락이 끊겼나요?

"중국 친척 통해 3년에 한 번쯤 송금도 하고 소식도 들었는데 2014년부턴 단절됐어요. 중국 베이징에서 개인전 열었다가 저와 가족, 친구가 위험에 빠진 직후부터입니다. '나는 선무다'엔 그 사건도 담겨 있어요. 전시는 ×판 났죠. 개막하는 날 그림 다 압수당하고 끝났어요. 탈북했을 때 공포가 되살아났습니다."

―전시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유머러스하게 북한 정권을 풍자하고 싶었지요. 관람객은 바닥에 깔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름을 밟아야 입장할 수 있었어요. 중국에 사는 북한 애들이 들어올 용기가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대사관 애들이 정문에 죽치고 앉아 입장을 막았어요. 남한 대사관 사람은 코빼기도 안 보였고요. 탈북했지만 저는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이 나라 외교가 당당하지 못하고 형편없구나 알게 됐죠. 신체적인 위협도 느꼈습니다. 가족이 중국에 다 같이 갔는데 잘못하면 북한으로 끌려가겠구나, 겁이 나고 등골이 서늘했어요."

―한국에서 살아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는지요.

"왜 정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할까, 하는 거예요. 불법도 아니고 공개적인 전시회에서 그런 꼴을 당했습니다. 어느 중국인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미안하다' 해서 제가 그랬어요. '당신이 미안할 건 없고 시진핑이 나한테 사과해야 한다'고."

―1년에 몇 점이나 그리고 얼마에 팔리는지요.

"보통 30~50점 만듭니다. 100만원짜리도 있고 3000만원도 받아요. 80%는 해외, 그러니까 교포분들이 삽니다. 전업작가가 된 직후엔 '김정일'을 많이들 사서 놀랐어요. 집에다 걸어 놓을 만한 그림은 아니잖아요(웃음)."

―병상에 누워 있는 김정일에게 소녀가 콜라를 주는 그림 '약 드세요'는 미국 주간지 타임에도 실렸습니다.

"당시에 북한은 외부의 치료가 필요한데 병이 나으려면 밖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콜라와 아디다스를 개방의 상징으로 썼지요."

―어떤 탈북 화가는 본명과 얼굴을 다 드러내는데.

"그렇게 놀더라고요. TV에 나와서 흔들거리는 탈북자들 보면 가족 모두 안전이 보장돼 있어서 저러나 싶어요."

―지금 '당신은 누구냐'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나요.

"분단 때문에 가족을 만날 수 없는 현실, 그게 나예요. 북한도 중국처럼 개방이 필요합니다. 너무 거짓말을 많이 해놔서 문을 열면 다 들통나겠지만요."

자신의 두 딸이 북한에 있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부칠 수 없는 상황을 그린 ‘할머니’.
자신의 두 딸이 북한에 있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부칠 수 없는 상황을 그린 ‘할머니’. / 선무 제공

김정은 신년사, 꿍꿍이는?

그동안 입국한 탈북자는 3만여 명에 이른다. 10명 중 1명은 북·중 국경에서 잡혀 감금되거나 처형된다. 그는 "가장 넘기 힘든 선은 이데올로기 같다"며 "세상에 있는 이념들을 다 지우고 싶어 '걸레질'이라는 작품도 만들었다"고 했다.

―최근 판문점에서 총격을 받으며 귀순한 북한 병사 소식 들으셨지요?

"죽다 살았으니 저처럼 운이 억세게 좋은 놈이구나 싶었죠."

―김정은은 무슨 꿍꿍이일까요.

"뻔하죠. 북한 체제를 계속 유지하려는 겁니다. 일단 핵을 만들어놓고 대화하려는 속셈이죠. 김정일 때 남북대화도 하고 같이 놀아봤는데 결국 재미를 못 봤잖아요. 시간 벌면서 믿을 만한 무기를 확보하려는 겁니다."

―그림들이 일종의 반어법(反語法)처럼 보입니다. 예술의 힘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림을 통해 저는 숨어도 숨은 것이 아니고 나서지 않아도 나선 것이 됩니다. 예술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북에서는 실종 상태고 남에서는 가면을 쓰고 살아요. 그림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게 큰 위안입니다."

―외롭지 않나요?

"이곳에도 내 가족이 있습니다. 부모형제 그리울 땐 술을 마셔요. 언젠가 평양에서 전시회를 여는 꿈을 꿉니다. 화폭 안에 내 세계를 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고. 북한에서처럼 당의 의도를 심는 선전이 아니라, 눈치 안 보고 내 생각과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이 땅에서 이루고 싶은 게 있나요?

"뭘 이루고 말고 하겠어요. 계속 작업을 하는 거죠. 가명 안 쓰고 얼굴을 드러내도 되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랍니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핵 단추' 운운하며 미국을 위협하면서도 평창동계올림픽 참여 의사를 밝혔다. 선무는 "김일성 때부터 해오던 수법이라 새롭지 않다"며 "그는 이득을 취하려 할 테고, 남한도 손해 보지 않으려면 외교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9일 판문점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 대해서는 "북한 입장에선 미국과 핵 협상을 하기 위한 발판일 것"이라고 했다. 새해 소망을 묻자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북녘의 그리움들이 안녕하기를."

Via 조선일보


Meet North Korea's Former Propaganda Artist

Sun Mu once made propaganda art for the North Korean government. Now a defector, he creates art freely in South Korea. But his exhibit was banned in China, and he has to keep his identity concealed to protect the family he left behind. AJ+'s Dena Takruri sat down with him just as tensions between North Korea and the U.S. were heating up.

via YouTube


그것이 행복이라면...展

부는 바람 / 쏟아지는 비에 / 찢기고 떨어져 나가 / 꽃잎은 / 광야에 흩날려도 / 다시 또다시 / 새싹을 틔여 / 꽃을 피우리라 / 그러면 / 우리 만나리라 / 만나서 / 얼싸 안으리라 (선무, 두고 온 그리운 얼굴들을 그리며, 남녘 서울에서, 2016년 7월 7일.) ● 작가의 개인 블로그(sunmu.kr)에 있는 글이다. 그의 절절하고 결연한 마음을 담은 모양새가 시인 못지않은 깊은 울림을 전한다. 개인적인 느낌이기도 하겠지만 선무 작가를 지근거리에서 대할 때마다, 익히 알려진 (탈북) 화가의 그것 대신 다가오는 그의 진중하고 묵직한 인간적인 면모들에 적이 놀라곤 한다. 그에게 통상적으로 따라붙는 숱한 관행적인 수식어들을 저편으로 한 채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지난한 삶에 대한 울림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종종 그의 일상적인 말과 글들이 혹은 취중진담과도 같은 호소나 여흥에서의 노래들이, 무엇보다도 그의 삶 자체가 그의 알려진 그림들보다도 더 마음에 가로 새겨졌던 것 같다. 이따금 그의 전시에서 볼 수 있는 텍스트나 설치 작업들도 매한가지이다. 작가 노트에 메모된 숱한 삶의 단상들, 그리고 힘과 기운이 가득 느껴지는 독특한 그의 서체나 이를 나무판에 꾹 눌러 새긴 텍스트 작업들에서 지난한 삶에 대한 작가의 고뇌와 열정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다. 이번 전시 역시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무가 아니라 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개인으로서, 혹은 그러한 우여곡절의 삶을 작업으로 이어가야 했던 작가로서 그가 겪으며 고민했던 세상에 대한 복잡하기만 한 심경들과 단상들, 그리고 그의 희망과도 같은 전언들이 독특한 설치 작업들로 펼쳐진다. 작가로서 개인 선무의 가슴에 품고 있던 마음들이나 어떤 지향들을 그나마 온전히 엿볼 수 있는 각별한 기회인 셈이다. 모두(冒頭)에 있는 그의 가슴 저린 염원을 담은 글처럼 말이다.

천사의 고민 An angel's worries, oil on canvas, 91x72cm, 2012

작가의 각별한 부탁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이유들로 이번 전시는 7월 27일 정전협정일에 맞춰 개막한다. 정전협정일은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의 정지와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의 무장행동의 완전한 중지를 보장하는, 이른바 한국의 군사정전을 확립한 목적으로 국제연합군과 북한군, 중공인민지원군 사이에 맺어진 협정일이다. 이 협정으로 인해 남과 북의 적대행위는 일시적으로 정지되지만 전쟁상태는 계속되는 국지적 휴전상태에 들어갔고 남북한 사이에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설치되었다. 역사적인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 긴 세월의 간극이나 여타의 이유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잊고 있었던 이 날을 작가는 또렷이 가슴에 기억한다. 그리고 아직도 이러한 실질적인 정전이 완성되지 못하고 있음을 주시하면서 이를 못내 기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이 의미심장한 기념일을 각인시키려 하는 이번 전시는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 대한 작가의 염원의 장이자 그가 그간의 숱한 그림으로 차마 못다 했던 바람들을 전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뜻 깊은 맥락에서 이번 전시의 전체적인 얼개가 가로 놓여진다. 작가의 인식처럼 아직 우리는 완전한 평화의 장에 놓이지 못한 분단국가이고 이러한 분단의 상처와 흔적들이 사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입장을 굳이 정치적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작가에게 남과 북이라는 체제 분단의 역사는 사회 전체의 그것이기 이전에 한 개인의 삶에 드리운 어떤 뼈아픈 상처와 아픔들이고 두 개의 체제, 국가에서 삶을 살아야 했고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넘나들면서 작업 활동을 해야 했던 작가 개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부딪히고 고민해야 했던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설치 작업의 텍스트로도 활용될, 작가의 노트에 빼곡하게 망라되어 있는 서로 다른 두 체제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단상들이 이를 증거 한다.('Korea의 풍경') 그가 북한과 남한의 일상을 살며 세세히 느꼈던 그 숱한 차이들의 목록 속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두 체제를 뼈저리게 겪고 느끼고 고민했었나를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작가가 채집하고 기록한 남과 북의 갖가지 관행화된 정치적인 선전 문구들과 이를 바탕으로 화해와 통합의 의미를 가시화시키고 있는 설치 작업도 두 체제를 가로지르려 하는 작가의 단상들과 소망을 담아낸다. ('Game') 이들 서로 엇갈린 텍스트들은 남과 북의 거시적인 이데올로기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미시적인 일상의 삶마저도 가로막고 있는 차이들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개념상의 차이를 넘어 작가의 지난한 삶 속에서 각인되어야 했던 삶의 차이마저 포함하고 있다. 단지 서로의 다름을 용인해야 하는 그런 차이가 아니라 서로를 겨누고 질시하는 그런 차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는 차이였기에 작가는 이들 서로 다른 차이들을 봉합하고, 가로지르려 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전하려 한 어떤 지향성 혹은 한 개인으로서 세상을 향해 던지는 소망의 실체들이다. 그렇기에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남과 북의 각기 다른 텍스트들은 그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의 삶을 몸소 체험해야 했고 이를 스스로의 삶으로 통합하려 했던 작가로서 고민했을 삶의 오만가지 번뇌 같은 것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마치 수행이라도 하듯 이러한 삶의 고민과 번뇌들을 조목조목 상기하고 가시화시키면서 이를 엮고 이어간다. 그 서로 다른 차이를 끊임없이 이어가면서 무화시키는 것이다.

리념5 Ideology5, oil on canvas, 130x193cm, 2013

선무(線無), 그의 예명(藝名)처럼, 하나의 삶을 두 개의 체제로, 국가로, 이데올로기로 분리시키는 저 단단한 차이의 선들을 지우고 봉합시키려 하는 것이다. 마치 그동안의 작가로서의 그의 삶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는 그의 작업의 지향이자 동시에 개인으로서의 삶의 내면의 움직임 같은 것들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를 흔히들 지칭하는 '탈북'이란 레테르는 옳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삶의 이동으로 그를 설명하기엔 그의 지난한 삶의 지난한 궤적이 훨씬 복잡할 뿐만 아니라 남북과 좌우 같은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을 넘으려 하는, '탈, 경계'인으로서의 면모가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이들 통합의 전언들을 담고 있는 설치 작업들도 같은 맥락에서 읽혀진다. 그저 통일이라는 거창하고 요란한 정치적인 구호나 상징으로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 개인의 지난한 삶에서 숱하게 마주해야 했던 내면의 고민들과 이를 애써 극복하려는 절절한 마음들로 읽혀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서로 다른 국가 체제들을 외시하는 갖가지 상징들도 단순한 외연적인 의미들을 넘어선다. 그렇게 일면적으로 해석하기에는 그의 지난한 삶의 궤적을 통해 겪었을 개인적인 내면의 상처들이 너무도 크지 않았나 싶다. 그가 힘겹게 걸어온 삶만큼이나 그는 한낱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피해자일수 있으며 그러한 복잡다단한 삶의 상처와 희망의 이야기들을 작업으로 봉합시켜오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펼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처럼 그는 온전히 자신을 향해 뛰는 심장이 있는 선무일 뿐이니 말이다.

그렇다. 그는 선무라는 한 작가이고 뜨거운 가슴을 품고 있는 한 개인일 뿐이다. 그에게 유독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면모가 도드라지는 것도 어쩌면 그가 지구상 유래 없는 서로 극명히 다른 두 체제의 국가를 몸소 경험한 작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서로 다른 체제 또한 그저 외적인 맥락일 뿐, 이들 두 다른 체제에 관한 것들만으로는 작가 혹은 개인으로서의 선무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면모를 다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 이번 전시를 통해 일부가 소개되고 이후 공개될 애덤 쇼버그(Adam Sjoberg)의 '나는 선무다 I AM SUN MU'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2014년 베이징의 한 미술공간에서의 개인전을 둘러싼 에피소드를 담은 이 영상은 견고한 이데올로기 지형 속에서 작가로서의 험난한 삶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아울러 정치적 목적을 최대한 배제한 채 예술이 가진 보편성을 토대로 분단의 특수성과 북한의 현실을, 그리고 선무의 통일에 대한 염원과 소망을 담은 메시지를 전한다. 하지만 결국은 중국 공안과 북한의 방해로 개인전이 무산되어야 했던, 현실의 작가가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가시화시키면서 작가를 둘러싼 체제, 이데올로기의 모순 또한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저 자신의 삶에 각인된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절실한 마음으로 이에 대한 해결을 염원한 작가에게 현실이 남겨야 했던 상처들이다. 그는 말한다. "남과 북의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죄'가 되어 돌아오고, 세상의 평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죄'가 되어 돌아오고, 이 세상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이야기 하는 것이'죄'가 되어 돌아왔다고" 어쩌면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그 내면의 실존을 향한 지향성 또한 더욱 커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그것들로만 보는 세상에 대해 그는 단지 자신의 삶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간의 왜곡된 시선들조차 개인의 삶으로 작가의 삶으로 굳게 다져가면서 세상을 향해 외친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 그것이 행복이라면 행복하지 않겠습니다 / 그것이 전부라면 살 생각이 없습니다 / 그것이 아닌 나를 알았습니다 / 이제 세상에 대고 소리칩니다 / 나는 선무라고"

설령 그것이 행복이라 할지라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작가의 외침은 단호하기만 하다.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이 외침은 아마도 작가가 거대한 체제가 꿈꾸는 집단의 행복이나 혹은 개인의 사적인 욕망만으로 채워지는 그러한 행복이 아니라, 다시 말해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정향된 그런 행복이 아닌 개인의 충일한 삶의 지향과 만족에서 삶의 행복을 찾으려 했기에 그렇게 외쳤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이 아닌 나(를 알았습니다)'는 결국 체제와 이데올로기로 규정되지 않는 나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비단 선무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외침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역시도 線無(선무)처럼, 우리 스스로를 외적인 잣대로 규정하는 것들을 가로지르고, 무화시키는 삶을 향해 나야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업은 분단이라는 현재 혹은 과거 저편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체제 모순이 극복이 될, 저 근 미래의 어떤 지평에 자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의 염원과 소망은 온갖 미디어상의 서로 다른 이유로 외치고 있는 구호와 이데올로기로서의 통일이 아닌, 그 서로 다른 체제를 몸소 체험하고 고민하면서 힘겹게 체득된 것들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분단체제의 아픔을 개인사의 내면적인 번민들로 고뇌해야 했을 한 개인으로서의 절절한 마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순된 경계들을 가로지르고 넘어서고자 하는 한 작가로서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이유로 대안공간 루프에서의 이번 전시 또한 작가의 익히 알려진 그림만을 소개하는 그런 전시가 아니라 작가가 간절히 염원하고 소망해왔던 마음들을 담아 전하려 했던 것 같다. 같은 땅에서 한 하늘을 보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와 우리가 동시에 다가서야 할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이번 전시는 작가 개인의 삶의 궤적에서 꾸준히 지향해 온 절실한 소망을 담고 있어 뜻 깊은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이런 이유들로 인해 동시대 작가들의 여느 공간적 설치 작업들과도 구별된다. 아무쪼록 이번 전시가 우리가 처한 이 남다른 현실은 물론 작가가 전하는 간절한 희망의 전언들이 모두에게 공감되는 뜻 깊은 장이길 기대해 본다. ■ 민병직


Sun Mu : From propaganda to protest, one artist’s creative rebellion against the Kim regime

At first glance, it’s easy to mistake the art of Sun Mu for North Korean propaganda. In one piece, Kim Jong-il is rendered in bright red, his face twisted into a toothy, grotesque smile. But upon closer inspection, Kim’s glasses reflect an execution scene—a military man’s gun raised in the direction of a female worker in the fields—and in his hand, the late dictator menacingly wields a knife.

The resemblance to the military posters that paper North Korean streets is no accident—trained as a propaganda artist for the Kim regime, Sun Mu used to make those posters. He escaped in 1998, fleeing a devastating famine that killed an estimated 330,000 people, seeking refuge in South Korea. There, the artist began painting once again, except now using his talents to forge blistering critiques of the regime for which he once worked.

His artwork evokes the painting and composition styles of self-glorifying regime art—which often represent leaders as god-like figures exercising extreme military might—but it depicts scenes of servile subjugation and absurd portraits of North Korean despots instead. Symbols of capitalist America pervade his portrayals of life in North Korea—a rosy-cheeked baby sips a Coca-Cola, a schoolgirl clutches a Starbucks cup, Mickey Mouse ears crown the head of Kim Jong-un—demonstrating the complicated geopolitics that govern the ideological landscape of North Korea. The subjects illustrated in his posters wear smiles stretched so widely they communicate exhaustion rather than joy. “To me, the most important thing about work is people,” Sun Mu says . “I always...try to figure out what it means [to live] life as a human.”

Even outside North Korea, the threat of retaliation by the regime is very real and Sun Mu still encounters resistance to his art. In Seoul, authorities mistook his posters for communist propaganda and questioned him about the meaning of his work. In 2014, a Beijing exhibition was suspended for unspecified reasons and his identity nearly exposed. He still has family in the country, which is why he uses a pseudonym and refuses to be photographed. And although he was granted South Korean citizenship, he says the North Korean government has attempted to kidnap and silence him. But Sun Mu hasn’t been deterred. I Am Sun Mu, a documentary chronicling his life and work, debuted this past October, and he is looking forward to more exhibitions of his work in Beijing and Europe this year. “I want to let the world know that people like me exist,” Sun Mu wrote in a poem that accompanied his 2014 Beijing show. Now, they do.

by Tasbeeh Herwees  Via Good

 


De kunstenaar zonder gezicht

Sun Mu De Noord-Koreaanse kunstenaar Sun Mu vluchtte eind jaren negentig naar China. Nu is er een film over zijn kunst.

 


Propagandakunst als verzetsdaad

De Noord-Koreaan Sun Mu (44) maakte ooit propagandakunst in opdracht van het regime. Na zijn vlucht draait de kunstenaar de rollen om en bestrijdt hij de dictatuur van Kim Jong-un met haar eigen middelen.

De schilderijen van de Noord-Koreaanse Sun Mu kunnen op het eerste gezicht doorgaan voor communistische propaganda. In helder blauw en knallend rood schildert hij vrolijke gezichten. Kinderen met partijsjaaltjes, oud-leider Kim Jong-il lachend met een zonnebril op. Een lief meisje met een brief in haar handen. Alleen zijn de beelden juist anti-communistisch en gericht tegen het regime: in de weerspiegeling van de zonnebril van Kim Jong-il zijn soldaten en hardwerkende landarbeiders te zien, het meisje drinkt cola en de brief zal nooit verstuurd worden.

Sun Mu (uit veiligheidsoverwegingen niet zijn echte naam) is in Nederland voor het 'Movies that Matter'-filmfestival, waar de documentaire 'I Am Sun Mu' wordt getoond. De film laat zien hoe de kunstenaar zich - zonder een moment met zijn gezicht in beeld te komen - voorbereidt op een grote solotentoonstelling in Peking. In de documentaire is hij alleen van achteren te zien, in het donker met een zonnebril op. Vluchtelingen lopen ook buiten Noord-Korea groot gevaar. Tijdens een opening van een expositie van Mu in Berlijn draagt hij een doek over zijn gezicht, alleen zijn ogen zijn te zien. Hij doet er alles om te voorkomen dat hij herkenbaar in beeld komt. In de lobby van een hotel in Den Haag hoeft hij zijn gezicht niet te bedekken, maar op de foto wil hij absoluut niet: "Dan zou ik mijn familie in gevaar brengen."

Sun Mu is een van de weinige Noord-Koreaanse kunstenaars die zijn werk met de rest van de wereld kan delen. Op een haast satirische manier bekritiseert hij het dictatoriale regime.

Hij schilderde bijvoorbeeld een grijnzende, dikke Kim Jong-il in een Adidas-trainingspak. En zijn zoon, de huidige leider van Noord-Korea, wordt afgebeeld omringd door allerlei Disneyfiguren.

Tijdens zijn militaire dienst in Noord-Korea had Sun Mu de opdracht om propaganda-schilderijen te maken. Hij maakte bijvoorbeeld afbeeldingen waarop Noord-Koreaanse soldaten de kelen doorsneden van Amerikaanse soldaten. Welgeteld één keer tekende Sun Mu zijn leider Kim Jong- il. Dat was eigenlijk ten strengste verboden, slechts een paar kunstenaars was het recht voorbehouden om de 'grote leider' af te beelden. Sun Mu had zijn deur op slot gedraaid. Hij was doodsbang dat de mannen van Kim Jong-il hem zouden pakken en neersteken. Zijn tekening was nog niet af of hij had hem al in brand gestoken.

Hij vertelt dat hij geen andere kunstenaars als voorbeeld heeft, zijn inspiratie vindt hij bij de dictators van Noord Korea: "Dat klinkt misschien gek. Maar mijn leven stond jarenlang in het teken van Kim Jong-un en Kim Jong-il. Ik heb keihard voor ze gewerkt en was zelfs bereid om voor ze te sterven."

Door de ernstige hongersnood die Noord-Korea eind jaren negentig in zijn greep hield, voelde Sun Mu zich in 1998 gedwongen om te vertrekken. Hij bereikte China zwemmend over de rivier de Tumen. Via Laos en Thailand kwam hij uiteindelijk in 2002 in Zuid-Korea terecht. Het regime liet hem alleen niet los. "In Noord-Korea leerde ik dat het kapitalisme er van de buitenkant mooi uitziet: met felle, knipperende lichtjes en glitters. Maar dat het systeem van binnen verrot is." De ommekeer kwam langzaam: "Op een gegeven moment begon ik steeds duidelijker te zien dat ik al die tijd bedrogen was. Ik kon als een buitenstaander naar mijn eigen land kijken. "

 

조선의 신 God of Chosun, oil on canvas, 116 x 80cm, 2007

Vloerkleed met teksten

Voor zijn tentoonstelling in Peking (2014) maakte hij een vloerkleed met lyrische teksten over de Noord-Koreaanse leiders en zijn vaderland. Iedereen die de tentoonstelling zou bezoeken, dus ook de medewerkers van de Noord-Koreaanse ambassade, zou bij het betreden van de ruimte met zijn voeten over dat kleed moeten stappen. Dat was althans zijn idee, maar dat moment is nooit gekomen, zucht hij.

Zijn tentoonstelling in Peking werd alleen op de dag van de opening - waar hij zelf sowieso al niet bij aanwezig kon zijn - gesloten door de Chinese autoriteiten. Hij besefte eens te meer dat hij nog steeds in gevaar is: halsoverkop moest hij met zijn vrouw en twee dochters het land verlaten. Terug naar Zuid-Korea waar hij inmiddels bekend staat als de 'kunstenaar zonder gezicht'.

Zijn ouders zijn nog altijd in Noord-Korea: "Hoe is het mogelijk dat een heel volk al die jaren bedrogen wordt?" Zijn familie en vrienden in Noord-Korea hebben zijn kunstwerken waar hij nu furore mee maakt nooit gezien. "Ik kan mijn geluk niet met hen delen." Hij is even stil: "Toch weet ik zeker dat als mijn ouders en andere Noord-Koreanen mijn schilderijen zouden zien, dat ze - ondanks de jarenlange hersenspoeling - het zouden begrijpen." Het is zijn droom om zijn werken ooit in Pyonyang te exposeren. "Ik heb hoop: Kim Jong-un ziet er niet gezond uit, hij zal denk ik niet lang leven."

De documentaire 'I am Sun Mu' (regisseur: Adam Sjöberg) is vanavond om 21.15 nog te zien tijdens het Movies that Matter festival in Den Haag.

Via Trouw


Sun Mu at the Movies that Matter Festival 2016

Interview with the Korean artist Sun Mu at the Movies that Matter Festival in The Hague

Defector Artists Dream of a Borderless Korea

TALES OF TWO KOREAS
Defector Artists Dream of a Borderless Korea

More than 28,000 North Korean defectors have settled in the South after fleeing their home country in a quest for freedom or escape from hunger. Among them are not a few people who had studied art or worked as artists in the North. As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Koreas shows no signs of abating, they express through their work their personal memories of their hometowns and yearning for reunification.

“Take Off Your Clothes and Play” by Sun Mu, 2015, oil on canvas, 130cm x 190cm

At first glance, many of the works by defector artists from North Korea express overt propaganda messages, though the implications are never the same as would be the case if they were back in the North. In fact, Sun Mu, a painter in his mid-forties, had actually experienced the consequences of such a misinterpretation of his art. In 2007, he held the first exhibition of his artworks in South Korea at a gallery in Jongno District, central Seoul. One day, a police officer suddenly burst in and said, “Would you please come with me for some questioning?” He was then escorted to the police station. It turned out that local residents and gallery visitors had reported to the police that his exhibition included “paintings extolling North Korea” — a criminal violation of the country’s national security law. During the Busan Biennale in 2008, his works on display were removed because they depicted the face of Kim Il-sung.
Song Byeok, another defector artist from the North, has gone through a similar experience. His paintings, including works depicting Kim Jong-il and Kim Jongun, were kept at his studio in a shopping mall in Gangnam, southern Seoul. Some elderly men who had seen these works complained to the authorities, which led to a visit by a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agent.

 

“Self-portrait” by Sun Mu, 2009, oil on canvas, 100cm x 40cm. A note scribbled on the painting says, “Now it’s about 10 years away from you. I wonder when your door will be opened.”

No Lines, No Borders
Sun Mu slipped out of North Korea in 1998 and arrived in South Korea in 2002, after roaming around China, Thailand, and Laos. He is known as the first North Korean defector artist in the South. Unlike others, he did not flee the North because he disliked the regime. When young, he was a member of the Korean Youth Corps. He attended an art college for three years and served as a propaganda artist in the army. He fled the North by happenstance. He was temporarily working odd jobs for a living in China, when an election day in the North approached. It is mandatory for all citizens in the North to participate in every election. Anyone who fails to vote can be condemned as a political offender and sent to a concentration camp. But he realized it would be impossible for him to return to his home in Hwanghae Province, a region far from the North Korea- China border, in time for the election. Then and there, he decided not to return to the North. In all likelihood, this idea might have been percolating in his mind; he had been impressed by the affluent lifestyle in the South, which he came to learn about in China.
After arriving in Seoul, he enrolled in the College of Fine Arts at Hongik University, where he went on to complete his graduate studies, and became a profes- sional artist. He adopted the pseudonym Sun Mu (“No Line”) as an expression of his ardent hope that the border between the two Koreas would one day disappear. He never uses his real name or reveals his face in public for fear that his life here would cause harm to his family members in the North.
Sun Mu’s works are characterized by incisive criticism of the North Korean leadership and system. Bright and deceptively cheerful in a kind of pop art style that incorporates elements of North Korean propaganda art, his paintings are implicitly — and undoubtedly — subversive, as exemplified by “Kim Jong-il in Adidas” and “A Jesus in North Korea.”
His sardonic depictions of North Korean reality have caught the attention of international art communities, which has enabled him to stage several solo exhibitions abroad — two in New York, two in Berlin, and one each in Jerusalem, Oslo, and Melbourne. He plans to participate in a group exhibition in France this year. Western media have introduced him as a “faceless artist,” taking note of his works lampooning the leaders he was raised to worship as gods.‘I Am Sun Mu’In many of Sun Mu’s recent works, aspects of life in both Koreas, of people and things or events, are depicted side by side, as parallels. This reflects his fervent desire to help bring about peace, reconciliation, and coexistence. He takes a look at the peculiar circumstances of national division and the reality in the North through the lens of artistic inquiry, while keeping a distance from political propaganda. He doesn’t want to fall victim to ideology ever again, he says.
To fully understand Sun Mu’s works, one needs to get beyond simplistic interpretation. This is because he expresses his personal experiences and emotions on canvas while suffering from ideological confusion between two political systems that are poles apart. Although 14 years have passed since he first arrived in the South, he still finds it difficult to adapt to various aspects of his new homeland.

Many a time, he still lives in the North in his dreams, only to awaken and find himself at a loss in his real-life circumstances in the South.
The documentary film “I Am Sun Mu,” which was shown as the opening work for the 7th DMZ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 held in September 2015, offers a glimpse of the kind of person and artist that he is. The 87-minute documentary, produced by American filmmaker Adam Sjoberg, sheds light on his life and work, and what he wants to bring about through art.
The film shows scenes from his aborted exhibition that had been scheduled to be held at a gallery in suburban Beijing in 2014. On the opening day, the Chinese police blocked people from entering the gallery. His artworks, together with a large ad banner, were removed and confiscated, and are still stranded in Beijing. He had intended to convey the Korean people’s desire for national reunification through works rendered mainly in red, white, and blue — the colors of the national flags of the six member countries of the stalled negotiations for North Korea’s nuclear disarmament.

 

“In the Square” by Sun Mu, 2015, oil on canvas,160cm x 130cm

“I wasn’t going to attend the opening anyway for security reasons. When my exhibition was called off, I was really afraid that I might be taken away, leaving my wife and two daughters behind,” he said.
In spite of many difficulties that he encounters as a marginal man, Sun Mu’s eyes are always looking out toward an open world. “When I visited New York for my exhibition, I realized that there are numerous different countries, including those in the Middle East, Africa, Latin America, and Europe, as well as the two Koreas, in the world. I want to create works about the lives of people in those lands,” he said.

via KOREANA


탈북 화가 선무, “그림은 나를 위한 프로파간다”

탈북 화가 선무는 얼굴 없는 작가다. 북한 출신 예술가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이지만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 북한에 있는 부모형제에게 피해가 갈까 봐 걱정해서다. 단순히 탈북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사회주의 프로파간다 예술을 패러디한 팝아트 작품이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를 풍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올해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인 <나는 선무다>는 그에 관한 영화다. 지난해 그가 베이징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 겪었던 일을 중심으로 그의 예술 세계를 다뤘다. ‘선무’는 ‘선이 없다’는 의미의 예명으로, 예술에는 경계가 없다는 그의 예술철학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는 베이징 전시회 과정에서 분명 예술에 경계가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영화는 긴박했던 전시회 전후를 담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1998년에 탈북한 화가 선무는 북한에 있는 부모형제에게 피해가 갈까 봐 ‘얼굴 없는 작가’로 활동 중이다.
ⓒ시사IN 조남진

1998년에 탈북한 화가 선무는 북한에 있는 부모형제에게 피해가 갈까 봐 ‘얼굴 없는 작가’로 활동 중이다.

북한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군복무 중 선전물 담당 화가로 활동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프로파간다에 정통하다. 3년 동안 중국에서 탈북자 생활을 한 뒤 라오스와 타이를 거쳐 한국에 들어온 그는 미술대학에 들어가 그림을 다시 배웠다. 그리고 그린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붓을 들었는데 떨렸다. ‘내가 정말 이 사람을 그려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서는 일반인이 함부로 김일성·김정일의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림을 그릴 때 누군가 뒤에서 칼 들고 위협하는 것 같아서 계속 뒤돌아보았다. 그렇게 그림을 완성한 후 ‘내가 남쪽으로 왔구나’ 하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남쪽에서의 경험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미술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하는 야한 게임에 놀라고, 미대 교수와 강사들이 특별한 기법을 강요하지 않고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라고 하는 것에 놀라고, 그렇게 뭘 그렸는지 모를 그림이 팔리는 것에 놀랐다. 그런 그가 가장 놀란 것은 예술가가 경찰을 대하는 태도였다. “사진작가 노순택씨와 2인전을 하는데 경찰이 찾아왔다. 그러자 노 작가는 ‘무슨 이유로 하는 조사냐. 영장 가지고 와서 조사하라’고 강하게 항의하며 돌려보냈다. 나는 북으로 다시 쫓겨나나 싶어 간이 콩알만 해졌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저것이 남한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암튼 큰 걸 배웠다.”

사진가 노순택과 선무의 독특한 ‘북한 프로젝트’

서울시립미술관의 특별전 ‘북한 프로젝트’에도 그의 작품과 노순택 작가의 사진이 동시에 전시 중이다(9월29일까지). 둘의 작업은 대비된다. 노 작가는 북한에서 남한의 모습을 보고 그는 남한에서 북한을 본다. “처음에는 노 작가가 북한 사진으로 남한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남북이 별개라고 봤다. 그냥 생각 없이 찍은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공감이 된다. 나도 남한에서 북한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998년에 탈북해서 남한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한 그는 지난해 베이징에서 전시회를 추진했다. 그런데 전시회를 열었던 미술관이 개관하는 날 봉쇄되었다. 가슴에 김일성 부자 배지를 단 북한 사람들이 전시장을 둘러쌌고 중국 공안은 전시회 주최 측을 조사했다. 그는 남북 대립의 냉혹한 현실을 실감하고 돌아서야 했다. 그때 압류된 그림이 아직도 베이징에 남아 있다.

이렇게 가파른 삶을 살았지만 그의 그림에는 위트가 있다. 어떻게 보면 북한 사회를 비꼰 것 같지만 다르게 보면 남한 사회를 비튼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고 인생이라고 했다. “그림을 통해서 나는 숨어도 숨은 것이 아니고 나서지 않아도 나선 것이 된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북에서는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위한 프로파간다를 했는데 여기서는 나를 위한 프로파간다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그림으로 대신하려 한다. 그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Via 시사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