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국내외서 가장 비싼 탈북화가

北서 배운 프로파간다 미술로 그곳의 ‘최고 존엄’ 조롱
“처음엔 김정일 그리는데 붓이 떨렸어요, 너무 무서워서”
참이슬·대동강맥주 그려놓곤 “통일 폭탄주인데, 맛이 좋습니다”

국내외에서 작품 값이 가장 비싼 탈북 화가 선무가 작업실에서 ‘너는 누구냐2’(190×130㎝)를 붙잡고 서 있다. 불온한 붉은색 바탕에 미키마우스를 그려넣어 북한 지도자 김정은을 풍자했다. 얼굴을 공개할 수 없어 마스크를 쓴 선무는 “천장에서 비가 샌 흔적이 남은 그림”이라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기에 더 멋이 있다”고 했다.
국내외에서 작품 값이 가장 비싼 탈북 화가 선무가 작업실에서 ‘너는 누구냐2’(190×130㎝)를 붙잡고 서 있다. 불온한 붉은색 바탕에 미키마우스를 그려넣어 북한 지도자 김정은을 풍자했다. 얼굴을 공개할 수 없어 마스크를 쓴 선무는 “천장에서 비가 샌 흔적이 남은 그림”이라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기에 더 멋이 있다”고 했다. / 김지호 기자

1998년 10월 두만강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건너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는 담배밭에 숨어 밤이 오길 기다렸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불안과 공포 속에 강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북한 쪽 수심은 얕아요. 중국으로 가까이 갈수록 툭 떨어졌습니다. 거기서부터는 헤엄을 쳤어요.”

‘얼굴 없는 화가’ 선무(線無·46)는 20년 전으로 돌아간 표정이었다. 등유 난로에 올려놓은 주전자가 김을 내뿜고 있었다. “북한에서 살 땐 심장도 내 것이 아니었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가슴팍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휘장을 달고 다녔지요. 탈북(脫北)하곤 떼어 버렸어요. 이제 심장은 저를 위해서만 뜁니다.”

그는 국내외에서 작품값이 가장 비싼 탈북 화가다. 얼굴도 본명도 숨긴 채 살고 있다. “북에 남은 부모형제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무’라는 가명은 ‘경계도 국경도 없다’는 뜻이다.

지난달 5일 행주산성 근처 작업실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즐비했다. 최고 존엄은 그의 붓끝에서 우스꽝스러워진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미키마우스, 팅커벨 같은 디즈니 만화 캐릭터들이 붉은 망토 입은 김정은을 포위한 그림을 그려놓곤 ‘벗고 놀자’란 제목을 붙이는 식이다. 북에서 배운 프로파간다(정치 선전) 미술로 그곳 지배자를 조롱한다. 선무는 “이제는 김일성·김정일이 하라는 대로 그리지 않고 나를 위한 프로파간다를 한다”고 했다. ‘같은 스타일로 생각만 다르게’하는 셈이다.

흘림체 ‘나는 선무다’. 선무가 붓으로 쓴 필체다.
흘림체 ‘나는 선무다’. 선무가 붓으로 쓴 필체다.

‘천국’의 국경을 넘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북한 삐라(대남 전단) 같은 포스터가 보였다. 남한 소주 참이슬과 북한 대동강맥주를 나란히 그려놓곤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폭탄주를 마시자’라고 적었다. “저게 ‘통일 폭탄주’인데 맛이 아주 좋습니다”라며 그가 커피를 건넸다.

―북한에서도 커피 드셨나요.

“커피라는 말도 몰랐죠. 맛은 지금도 몰라요(웃음).”

―왜 탈북했는지요.

“고향이 황해도인데 중국에 친척이 있었어요. 너무 배가 고파 돈이나 물건을 건네받으러 올라갔지요(1994~1998년 북한은 기근이 극심했다). 여행증명서는 함북 청진까지만 받고 숨어서 두만강변까지 갔고, 돈 받고 재워주는 민가에서 전화를 걸었어요. 그런데 중국 친척이 ‘국경 감시가 강화돼 지금은 위험하니 돌아가라’는 거예요. 주머니에 돈도 없고 집에 가다간 개죽음당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요?

“여기까지 온 김에 강을 건너보자, 무작정 떠난 겁니다. 안전한 경로를 일러줄 브로커도 제겐 없었어요.”

―북한이 싫어 도망친 건 아니군요.

“과거의 저는 김일성·김정일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던 놈이에요. 그게 전부였으니까. 중국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믿었던 게 다 허상이고 가짜라니. 이젠 제가 북한에 살았다는 사실이 신기해요. 사회를 저런 식으로 끌고 간다는 게 기가 막히죠.”

―중국에선 어떻게 살았나요.

“나무껍질도 벗기고 담배 수매하는 곳에서 잡일도 했어요. 잠깐이지만 건달로도 살았고요. 조선족들은 ‘야, 너네는 배곯잖아. 강택민(장쩌민)이 봐. 우리는 그래도 배불러’ 하면서 탈북자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처음엔 ‘이 자식들이 제정신인가’ 했어요. 북한에서 나와 보니 김일성·김정일은 욕만 먹고 잘한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길바닥에 걷어차이는 자갈처럼요?

“딱 그런 꼴이었죠. 중국에서 남한 사람은 우러러보는데 북한 사람은 숨어다녀야 했어요. 남한에서 온 사업가들 주머니 털 생각을 하는 놈들도 많았습니다. 혼란스러웠어요.”

―한국엔 어떻게 들어왔나요.

“중국은 싫고 불법체류자 신세라 남한 국적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2001년 말에 들어왔습니다. 라오스에선 감옥에 갇힌 적도 있는데 ‘I am from South Korea’라고 했더니 남한 대사관에 연락한 거예요. 태국에 머물 때 선교사가 ‘남한 사회는 혈연·지연·학연이 있어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저는 학연을 붙잡기로 했습니다.”

이념의 옷을 벗고 세계와 함께 놀자는 뜻을 담은 그림 ‘벗고 놀자’(130×190㎝). 김정은이 디즈니 만화 캐릭터들에 포위돼 있다.
이념의 옷을 벗고 세계와 함께 놀자는 뜻을 담은 그림 ‘벗고 놀자’(130×190㎝). 김정은이 디즈니 만화 캐릭터들에 포위돼 있다. / 선무 제공

“눈 감으면 북한, 눈 뜨면 남한”

홍익대 회화과 03학번으로 입학했다. 탈북자의 학비는 정부와 대학이 반반씩 댔다. 그는 “대학원은 대출받아 다녔는데 졸업한 뒤 작품이 잘 팔려 금방 다 갚았다”고 했다.

―북에서도 화가가 꿈이었나요?

“해마다 12월 31일이면 전국에서 예술적으로 재능 있는 아이들을 뽑아다 공연을 합니다. 김일성이 걔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TV로 봤어요. 나도 미술로 지도자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지요. 군복무 할 땐 우리 대대(大隊)의 역사와 김일성이 지도한 내용을 그림으로 그렸어요.”

―한국땅 밟을 때 첫인상은 어땠나요?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중국이나 태국과는 달랐습니다. 되게 깨끗한 게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국정원 가면 두들겨 패면서 조사한다’고 들었는데 그렇진 않더라고요.”

―처음 정착한 곳은요.

“(충남) 공주요. 1지망은 다들 서울입니다. 저도 그랬는데 광주비엔날레를 들어봐서 2지망을 광주로 쓴다는 게 그만 공주를 적었어요.”

―홍익대에서 만난 청년들은 어떻던가요.

“신입생 환영회부터 충격의 연속이었죠. 배알대로 장기자랑을 하라는데 저는 막막해서 맥주병을 깼습니다(웃음). 수강 신청도 낯설었어요. 북한과 달리 선택해야 해 괴로웠고 책임이 뒤따라 두려웠죠. 동기들이 띠동갑인데 ‘형, 우리 한잔해요’가 지나가는 말이더라고요. 저는 그걸 진짜로 받아들여서 오해도 생겼죠. 처음엔 김정일을 그렸습니다. 붓이 떨렸어요. 이놈을 그려야 하는데, 그게 내 전부였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봤어요.”

―왜죠?

“북한에선 함부로 김일성·김정일을 그릴 수 없으니까. 이래도 되나 싶고 무서웠습니다.”

―탈북 20년이니 적응은 끝났겠지요.

“아직도 이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입니다. 북에서 받은 세뇌를 쉽게 떨칠 순 없어요. 탈북자 대부분이 그럴 겁니다. 북한에도 ‘자유’라는 말은 있지만 정권이 그어놓은 선 안에서의 자유일 뿐이죠. 탈북 초기엔 ‘눈 감으면 북한, 눈 뜨면 남한’이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남한에 들어와 5년 동안은 매일 북한에 가 있는 꿈을 꿨어요. 밤마다 김일성·김정일에게 쫓겨요. 눈 뜨면 한숨이 나오죠. 요즘에는 1년에 한 번 정도로 줄었습니다. 육체적인 탈북보다 심리적인 탈북이 훨씬 오래 걸렸어요.”

병상에 누워 있는 김정일에게 소녀가 콜라를 주는 ‘약 드세요’.
병상에 누워 있는 김정일에게 소녀가 콜라를 주는 ‘약 드세요’. / 선무 제공

“한국 외교, 중국에 더 당당해져야”

2015년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 ‘나는 선무다'(감독 아담 쇼베르그)는 그를 다룬 영화다. 명절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두 소녀가 보인다. 그런데 철조망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 그림 제목은 ‘할머니’. 선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딸들이 물어요. 우리 할머니는 어디 있냐고. ‘윗동네’에 있는데 갈 수 없는 상황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이곳에선 가족이 어떻게 되나요.

“중국에서 조선족 여인을 만났고 한국에 들어온 뒤 결혼했어요. 여덟 살, 열한 살 난 딸이 둘 있습니다.”

―북에 남은 부모형제와는 연락이 끊겼나요?

“중국 친척 통해 3년에 한 번쯤 송금도 하고 소식도 들었는데 2014년부턴 단절됐어요. 중국 베이징에서 개인전 열었다가 저와 가족, 친구가 위험에 빠진 직후부터입니다. ‘나는 선무다’엔 그 사건도 담겨 있어요. 전시는 ×판 났죠. 개막하는 날 그림 다 압수당하고 끝났어요. 탈북했을 때 공포가 되살아났습니다.”

―전시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유머러스하게 북한 정권을 풍자하고 싶었지요. 관람객은 바닥에 깔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름을 밟아야 입장할 수 있었어요. 중국에 사는 북한 애들이 들어올 용기가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대사관 애들이 정문에 죽치고 앉아 입장을 막았어요. 남한 대사관 사람은 코빼기도 안 보였고요. 탈북했지만 저는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이 나라 외교가 당당하지 못하고 형편없구나 알게 됐죠. 신체적인 위협도 느꼈습니다. 가족이 중국에 다 같이 갔는데 잘못하면 북한으로 끌려가겠구나, 겁이 나고 등골이 서늘했어요.”

―한국에서 살아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는지요.

“왜 정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할까, 하는 거예요. 불법도 아니고 공개적인 전시회에서 그런 꼴을 당했습니다. 어느 중국인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미안하다’ 해서 제가 그랬어요. ‘당신이 미안할 건 없고 시진핑이 나한테 사과해야 한다’고.”

―1년에 몇 점이나 그리고 얼마에 팔리는지요.

“보통 30~50점 만듭니다. 100만원짜리도 있고 3000만원도 받아요. 80%는 해외, 그러니까 교포분들이 삽니다. 전업작가가 된 직후엔 ‘김정일’을 많이들 사서 놀랐어요. 집에다 걸어 놓을 만한 그림은 아니잖아요(웃음).”

―병상에 누워 있는 김정일에게 소녀가 콜라를 주는 그림 ‘약 드세요’는 미국 주간지 타임에도 실렸습니다.

“당시에 북한은 외부의 치료가 필요한데 병이 나으려면 밖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콜라와 아디다스를 개방의 상징으로 썼지요.”

―어떤 탈북 화가는 본명과 얼굴을 다 드러내는데.

“그렇게 놀더라고요. TV에 나와서 흔들거리는 탈북자들 보면 가족 모두 안전이 보장돼 있어서 저러나 싶어요.”

―지금 ‘당신은 누구냐’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나요.

“분단 때문에 가족을 만날 수 없는 현실, 그게 나예요. 북한도 중국처럼 개방이 필요합니다. 너무 거짓말을 많이 해놔서 문을 열면 다 들통나겠지만요.”

자신의 두 딸이 북한에 있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부칠 수 없는 상황을 그린 ‘할머니’.
자신의 두 딸이 북한에 있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부칠 수 없는 상황을 그린 ‘할머니’. / 선무 제공

김정은 신년사, 꿍꿍이는?

그동안 입국한 탈북자는 3만여 명에 이른다. 10명 중 1명은 북·중 국경에서 잡혀 감금되거나 처형된다. 그는 “가장 넘기 힘든 선은 이데올로기 같다”며 “세상에 있는 이념들을 다 지우고 싶어 ‘걸레질’이라는 작품도 만들었다”고 했다.

―최근 판문점에서 총격을 받으며 귀순한 북한 병사 소식 들으셨지요?

“죽다 살았으니 저처럼 운이 억세게 좋은 놈이구나 싶었죠.”

―김정은은 무슨 꿍꿍이일까요.

“뻔하죠. 북한 체제를 계속 유지하려는 겁니다. 일단 핵을 만들어놓고 대화하려는 속셈이죠. 김정일 때 남북대화도 하고 같이 놀아봤는데 결국 재미를 못 봤잖아요. 시간 벌면서 믿을 만한 무기를 확보하려는 겁니다.”

―그림들이 일종의 반어법(反語法)처럼 보입니다. 예술의 힘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림을 통해 저는 숨어도 숨은 것이 아니고 나서지 않아도 나선 것이 됩니다. 예술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북에서는 실종 상태고 남에서는 가면을 쓰고 살아요. 그림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게 큰 위안입니다.”

―외롭지 않나요?

“이곳에도 내 가족이 있습니다. 부모형제 그리울 땐 술을 마셔요. 언젠가 평양에서 전시회를 여는 꿈을 꿉니다. 화폭 안에 내 세계를 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고. 북한에서처럼 당의 의도를 심는 선전이 아니라, 눈치 안 보고 내 생각과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이 땅에서 이루고 싶은 게 있나요?

“뭘 이루고 말고 하겠어요. 계속 작업을 하는 거죠. 가명 안 쓰고 얼굴을 드러내도 되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랍니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핵 단추’ 운운하며 미국을 위협하면서도 평창동계올림픽 참여 의사를 밝혔다. 선무는 “김일성 때부터 해오던 수법이라 새롭지 않다”며 “그는 이득을 취하려 할 테고, 남한도 손해 보지 않으려면 외교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9일 판문점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 대해서는 “북한 입장에선 미국과 핵 협상을 하기 위한 발판일 것”이라고 했다. 새해 소망을 묻자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북녘의 그리움들이 안녕하기를.”

Via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