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없는 삶을 향한 실존적 발언 ● 선무(線無). 그 이름이 함의하는 바, ‘선 없음’은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선언이다. 선무의 예술은 경계 없는 삶을 향한 실존적 발언이다. 그는 체제로부터 이탈한 개인이다. 그는 체제가 전혀 다른 북한에서 남한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겼다. 따라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삶의 가치와 방식이 전혀 다른 두 체제에 관한 차이에 근거하고 있다. 삶의 터전을 옮긴 예술가 선무에게 있어서 탈주의 정신은 예술가로서의 삶에 깊이 투영된 실존이다. 비록 그것이 지배와 복종으로 얽혀 있는 인류 문명사 자체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로부터 또 다른 체제로의 이동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에서 나고 자라서 남한으로 이주한 탈주의 실존은 선무의 예술세계 근간을 형성하는 주요 모티프이다. 선무의 예술적 발언은 서로 다른 경제구조나 정치구조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접한 세상의 면면, 특히 그가 태어나서 자라난 북한 땅의 현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차이를 넘어서기까지 남한에서 체험한 7년의 세월은 한 개인의 삶 전체를 뒤바꾼 긴 세월이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내면 체험을 키우고 공론영역에서의 발언으로 공표하기에는 선무의 남한 체험은 아직 짧고 얇은 수준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것을 듣고 보았을 것이고, 이곳 남한 사회마저도 자본과 정치권력의 작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회라는 것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남한을 이야기하지 않고 북한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서사 대부분은 북한 사회에 관한 것이다. 바로 이 점, 선무가 남한 사회에서 북한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점을 들어 그의 서사를 국외론자의 낯선 이야기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이야기로 들을 것인지는 선무를 독해하는 우리의 사유와 감성에 달려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라보는 권력의 작동 방식이나 사람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 체제 사이의 유사성과 차별성이 공존한다는 데에 있다.

엄마 여기 서울이야 Mom. This is Seoul, oil on canvas, 91x72cm, 2010

선무는 이 시대의 예술가들 가운데 매우 드물게 분단 이데올로기가 고착화한 한반도의 양면을 동시에 성찰할 수 있는 독특한 체험의 소유자가 이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선무의 그림은 ‘세상에 부러움 없이 행복한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가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는 지금 여기 남한의 상황과 분리가능한 것이 아니다. 남과 북은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휴전에 합의한 상황에 놓여 있다. 말 그대로 위기의 일상화이다. 전쟁 발발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분단과 대결의 구도를 종식시키지 못한 채 평화와 위기,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고 있다. 선무는 이 분단과 대결의 상황에서 스스로 한 쪽으로부터 다른 한 쪽으로 이탈한 존재로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선택한 새터민이다. 따라서 그의 내면에는 생존의 가치와 방향에 관한 복잡다단한 서사들, 즉 절망과 희망, 상처와 환희 등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고착화한 대결구도 속에서 탈주의 실존을 담은 선무를 통해서 북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치나 미디어가 양산하는 정보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도 그의 그림이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선무의 작품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는 집단주의에 대한 거부이다. 그는 해맑게 인간의 본성을 숨기지 않을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환하게 웃으며 세상에 부럼 없이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을 선전하는 장면을 여러 장면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행복을 선포하는 어린 아이의 배경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선무의 그림은 이처럼 단순명료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북한은 민중의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위기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는 여전히 체제의 우월성이나 가능성을 선전하고 선동한다. 선무의 그림이 낯설면서도 친숙한 것은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양식을 패러디해서 그 양식이 애초에 의도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묻는다. 과연 그들은 행복한가? 나아가 그는 묻는다.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행복의 여부는 타자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바에 의거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선무가 말하는 것은 그들의 행복과 불행을 예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복을 기획하고 있는 집단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아이팟을 들고 해맑게 웃고 있는 북한의 소녀를 보면서 여전히 ‘우리는 행복하다’고 강변하는 선무의 상황설정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선무의 그림에서 보이는 비판적 서사들이 체제의 차이를 넘어서는 구조의 동질성을 어렴풋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그가 남한에 정착한 첫해에 열린 2002 월드컵 게임 열풍을 접한 선무는 남한 사회에도 집단주의 광기가 팽배하다는 점을 보고 느꼈다고 한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단일한 사안에 몰입하는 대중의 모습은 북한에서 익히 보았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집단의 광기 속에서 안도하며 희열을 느끼는 개인의 모습은 아마도 인류 공통의 것일 텐데, 문제는 그것을 조작하고 활용하는 권력의 속성에 있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바로 이것, 권력과 대중,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 관한 선무의 통찰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는가 What adults give to children, oil on canvas, 91x71cm, 2009

선무의 그림이 가지는 또 한 가지의 독특함은 스타일에 있다. 선무의 그림 스타일에는 두 가지 대비되는 특징이 있다. 그의 그림에는 대담하게 그은 선의 맛, 즉 일획의 감성을 잘 살린 것이 있는가 하면, 붓질 자국을 남기지 않은 색면 처리로 형상의 윤곽을 명쾌하게 구분짓는 것이 있다. 전자의 그림은 아무래도 북한에서 말하는 조선화의 영향이 확연히 보인다. 후자는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유니크한 화면 구성과 닮아 있다. 조선화의 영향은 붓질뿐만 아니라 색채의 구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밝고 맑은 색채를 구사한다는 조선화의 원칙은 선무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완연히 나타나는 특징이다. 참새나 갈대, 갈매기 등의 표현은 몰골 필체의 획선으로 대상의 동세를 잡아내는 날렵한 붓질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그것은 키치 회화의 범본이 되는 매우 친숙한 스타일이다. 동일한 형상을 반복해서 배치한다거나, 단일한 것 또는 대비되는 두 색의 병치 등으로 심플한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포스터 양식의 친숙함도 선무 그림의 대표적인 양상이다.

간결한 형상표현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비판적 메시지를 담는 선무 그림은 북한의 프로파간다 포스터를 패러디한 블랙 유머이다. 그것은 북한이 선전하고 선동하는 체제의 우월성이나 조작된 행복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다. 그렇다면 남한 사회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북한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대면하면서 그 사유와 감성에 동의하는 맥락은 무엇일까? 북한의 비극을 바라보는 지금 여기 우리의 시선이 단지 한반도 북쪽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비판과 연민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무의 예술을 보다 넓은 해석의 지평으로 펼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역지사지에 있다. 우리 안의 파쇼 우리 안의 가부장, 우리 안의 우상의 모습을 선무 그림에서 발견하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자본의 이름으로, 권력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일상 속 폭력과 야만의 그림자가 우리 삶의 주변에서 어른거리고 있다는 점. 경계없는 삶을 지향하는 실존의 예술가 선무의 그림이 남 얘기가 아닌 내 얘기로 깊이 다가오는 이유이다. ■ 김준기